스물여덟 살의 소로우는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 월든호숫가 숲 속에서 2년간 홀로 살았다. 그는 강인하고 열정적인 스파르타인처럼 삶이 아닌 것은 모두 때려 엎고 인생의 숭고함을 온전히 체험하기를 원했다. 소중한 인생이 사소한 곳에 허비되지 못하도록 세상과 격리된 숲 속의 삶을 용기 있게 선택했다.
주변과 격리된 삶은 외롭기는 하지만 마음을 안정시키고 삶에 오롯이 집중하게 한다. 월든호수숫가 같이 바깥세상과 단절된 듯한 우리의 공간에 머물고 있으면 모든 것이 망각되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방금까지 택배를 하고 왔다는 사실조차도 우리의 몸 한구석에 남겨진 옅은 통증으로 간신히 알아차릴 정도였다. 소로우처럼 극단적으로 자연 속에 스스로를 던져버릴 용기는 없어서 숲 속 언저리까지 간신히 다가온 우리는 세상과 떨어져 사는 삶이 주는 매력에 서서히 중독되듯 적응해 가는 중이다.
이곳은 가느다란 두 줄기의 길로 세상과 연결이 된다. 주변 큰 신도시와 지하철역으로 소비하러 가는 첫 번째 길과 산업단지를 통과하며 택배센터와 연결된 일하러 가는 두 번째 길이다. 일하고 소비하기 위해 길 위에 들어설 때마다 우리는 다시 세상과 연결이 된다. 들어선 길 위에서 가장 먼저 시야로 들어오는 건 주유소 앞에 내걸린 가격입간판이다. 경유값이 잠시 내리는가 싶더니 또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다. 유가를 주무르는 OPEC와 같은 큰손들은 조금이라도 가격하락 조짐이 보이면 즉시 다시 되올려 놓는다.
점심때 종종 들리던 편의점 점주분이 슬며시 부부가 함께 택배 하면 수입이 괜찮지 않냐며 물어본다. 매장매출이 예전 같지 않다며 하소연하더니 사실인가 보다. 비 오는 날 한참 택배를 하는데 우산을 받쳐든 중년남성이 머뭇거리다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택배일을 하려고 준비 중인데 자기가 알아본 정보들이 옳은 건지 이것저것 확인해 본다. 잠시 바쁜 택배일손을 멈추고 성심껏 말해줬다. 감사하다며 웃으며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행운을 빌며 응원하는 마음이 절로 생겨난다. 힘든 택배일에 주변의 관심들이 점점 더 많아져간다는 사실은 요즘 그만큼 먹고사는 문제가 더 힘들어졌구나 싶어 지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쳇 GPT 등 AI와 로봇의 눈부신 발전으로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등장 때만큼이나 세상은 또 한 번 크게 요동치며 변화될 조짐을 보인다. 커져가는 기대만큼이나 우리가 알던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는 듯한 사회적 불안감 역시 커져만 간다.
생존을 위해 들어선 불안한 이 길 위에서 맺어지는 수많은 관계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경쟁하는 사이로 변질되었다. 이런저런 얽히고설킨 관계에 시달리다 돌아오는 날이면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이 저절로 생겨난다. 그런 세상에서 사는 삶은 어떠할까라며 궁금해진다.
소설 <더 로드 THE ROAD>를 쓴 코맥 맥카시는 긴 세월을 은둔의 작가로 보냈다. 제대로 된 일자리도 없이 팔 년간 헛간 같은 곳에서 살며 목욕은 호수에 나가서 해결하곤 했다. 곤궁한 생활에서도 죽으란 법은 없더란 소신을 가지게 된 그도 이 땅에서 인간과 도시가 소멸한 뒤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궁금했었나 보다.
소설 <더로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사유로 문명이 멸망한 이후의 삶을 우울한 흑백처럼 그려냈다. 한 남자와 아이가 생존을 위해 목적도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바다가 있는 남쪽을 향해 무작정 길을 걷고 또 걷는다. 황량한 잿빛 세상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를 약탈하고 죽이고 심지어 잡아먹는다. 추위, 굶주림, 불안이 연속되는 상황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만이 세상의 전부였다. 넝마 같은 담요 등 생필품이 담긴 카트와 신발을 지켜내려는 필사적인 모습과 생존을 위해서 잔인하게 돌변하는 인간들의 본성을 냉혹하리만큼 실감 나고 세밀하게 표현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읽고 난 후 잔뇨 같은 우울감이 불편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진정한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하는 수작이다. 생존을 위해 식량을 구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선한 사람과 악한 이를 구별할 줄 아는 능력임을 깨닫게 하는 작가는 사람의 잔혹함과 이기적인 면을 너무 잘 알기에 사람들과 거리를 둔 삶을 살아온 건 아니었을까. 하지만 소설은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한 인생의 여정에서 그나마 안전을 보장받는 유일한 길은 선량한 이들과 함께 동행하는 것임을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택배를 하는 동안 각종 불합리한 갑질과 진상고객들에게서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 긴장하고 경계하며 일하곤 했다. 소설 속 남자가 아들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단 두발이 장전된 권총을 움켜쥔 채 늘 주변을 경계하며 곤두선채 응징하려는 모습이 오늘을 살아가며 타인을 대하는 나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사람들과 떨어져 살았지만 소로우는 사람과의 교제를 즐기고 열정적으로 만났다. 관계에 시들해지면 숲 속의 푸른 나무들과 산새들을 통해 삶의 활력을 재충전받았다.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것같이 팽팽해진 마음의 긴장과 적대감을 이완시키고 누그러뜨리기에는 <푸른 숲>만큼 좋은 처방제는 없으리라. 월든호수에게서 감미롭고 자애로운 우정을 그가 느낀 것처럼 곧 떨어져 버릴 것 같은 벚꽃들을 아쉬워 하며 뒷동산 숲길을 향했다. 벌써 벚꽃잎들이 양탄자를 깔고 반겨주듯 바닥에 흩날리고 있다.
<비알로비에자 푸차>는 폴란드와 벨루로시 사이 국경에 걸쳐있는 유럽의 마지막 남은 저지대 원시림이다. 거대한 물푸레나무와 보리수나무, 참나무로 이루어진 500년 된 원시림이다. 사람 없이 500년이 지난다면 <비알로비에자> 같은 진짜 숲들이 여기저기서 스스로를 되살려낼 것이다. 자연은 사람의 손길을 거부한다. 앨런 와이즈먼은 <인간 없는 세상>이란 저서에서 사람이 사라진 곳에서 숲과 자연이 되살아난다고 했다. 뭐든지 관리하고 정복해야 만족하는 인간의 본성이 사람도 자연도 망친다. 정복하고 관리하려는 본성이 인생을 관계지옥으로 만들고 스스로를 자해하는 건 아닐까.
<비알로비에자>처럼 원시림이 아닌 사람의 손길이 묻은 얕은 뒷동산 길이지만 겸허해진 마음으로 숲 속길에 올라서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다. 사람이 사라진 길 위에서 느껴지는 숲 속의 바람결과 나뭇잎사이로 갈라져 나오는 햇살이 참 감사하고 행복하다. 알지 못하는 희망감이 느껴진다. 잠시 후 산길 모퉁이를 돌아서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산바닥에 뿌리가 드러난 곳에서 감춰진 봄의 심장을 발견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소리는 또 다른 관계를 희망하게 만드는 갈망의근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