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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See you, 왜 아바타족의 인사가 되었을까?

당신을 바라봅니다. 1

by 코나페소아

영화 속 가상의 존재이지만 아바타족의 <I SEE YOU>라는 인사는 의미적으로 참 따스하고 친근하게 와닿는다. 아바타족은 자연과 공동체를 통해 생존하는 종족이다. 그들은 관계지향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분신이기도 하다. 카메론 감독은 <바라본다>라는 인사말 속에 이런 상징을 담아내려 의도했다.

01. 바라본다는 것은 단순한 시선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다.

그것은 관심이 있거나 호기심이 있는 대상을 바라보는 행위이기도 하다. 바라보는 것은 또한, 무언가에 대한 사랑이나 감정을 느끼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휴일이지만 습관적으로 새벽에 일어났다. 홀로 천천히 산책하다 보면 아파트정원에 심긴 나무와 꽃들에게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바람에 나부끼는 데이지, 쏟아지는 햇살을 고스란히 품은 청록의 나뭇잎들이 눈부시다. 걸음을 멈춘 채 한동안 꽃과 풀잎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은 점차 평온에 젖어든다. 소로우가 월든호숫가의 나뭇잎 하나하나가 친화감으로 부풀어올라 친구처럼 대해주는 감미롭고 자애로운 우정을 느꼈던 것처럼 한동안 나뭇잎과 꽃, 바람결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행동을 이끌어내는 확신은 내재된 생각이나 욕망, 또는 미리 계산된 계획이나 원칙에서 제조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벗어난 바깥세상의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경험되면서 자연스레 수용되는 것이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확신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생각에 자갈을 물린 채 바라본다는 것은 그것을 벗어나 실제로 돌아가는 방식에 겸허히 나를 내려놓았음을 의미한다.


요즘은 아내를 자주 바라본다.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상태인지 고스란히 느껴온다. 말없이 바라보는 눈길의 의미를 아내는 용케 알아차린다. 서로의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말없이 미소만이 오간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갈등하고 원망했고 함께 슬퍼하며 힘겨웠던 숱한 유랑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내를 바라볼 때마다 관계에 서툰 나로 인해 힘겨워하던 그녀의 모습들이 떠올라 애잔해지고, 그럼에도 변함없이 곁을 내주는 아내가 고맙고 사랑스러울 뿐이다.


바라볼수록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은 서로 온전히 하나가 되어가는 궤도에 안착했다는 긍정적인 감정신호이다.

02. 바라보는 것은 또한 위로의 표시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내가 그들을 걱정하고 있고 내가 그들과 함께였다는 것을 알리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기를 하던 중에 간선차량의 도착이 지연되어 잠시 쉬는데 지친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가슴이 아렸다. 낯선 일, 낯선 환경에서 일하는 남편이 걱정스럽다며 한사코 함께 하려는 아내이다. 무겁고 힘든 짐들이 나오는 날이면 나는 안절부절이다. 짐들을 쌓으면서도 눈길은 계속 아내를 향한다. 아내는 이젠 레일에 흘러나오는 우리 짐들 뿐 아니라 곁에 있는 동료의 짐들도 챙겨준다.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아내가 레일 곁에서 동료들과 수다 떨며 웃는 모습은 신기하기만 하다. 간식이나 음료를 자주 챙겨 주고받아와서 점심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다. 여성은 사회적 동물의 표본이다. 아내가 나온 뒤로 우리 탑차 주변은 사랑방처럼 시끌해졌다. 힘들지만 재미있다는 아내를 보면서 안심이 되면서도 염려도 된다. 아내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늘 냉탕과 온탕을 오고 간다.


<850만 명의 60년 대생들이 은퇴한다>라는 내용의 다큐를 봤다. 60년대생은 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부양하면서 자신의 노후도 준비해야 하는 마지막 세대라는 말이 참 무겁다. 부모에 대한 부담이 남아있는데 노후에 자식들에게 짐이 안되게 살아야 하는데, 현실적인 대안은 돈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돈을 버는 직업을 유지하는 것이다. 벌어둔 돈이 없다면 죽는 순간까지 일해야 한다는 농담 섞인 아내의 말이 진담처럼 와닿는 현실이다. 유튜브에서 백발의 은퇴전문가는 노년에 후회 없이 살려면 체면을 버리고 막일이라도 하라며 다그친다. 옳은 말이지만 인생이 죽는 순간까지 한 점의 여백 없이 각박해진다. 60년생의 은퇴스나미속에서는 죽는 순간까지 일하는 게 유일한 노후대책이다. 이럴 때면 활짝 열린 탑차 안에 그득하게 쌓인 짐들이 감사해지고 소중하게 여겨진다. 내 몸이 언제까지 버텨낼지, 얼마나 숨을 쉬고 살아낼지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그저 눈앞에 큼직한 삶의 크레바스 구간을 통과하려 한줄기 생명줄에 온몸을 내맡기고 지탱하듯 포터의 운전대를 단단하게 부여잡는다.


요즘은 아들이 만든 음악이 어둡다. 실험적으로 만든 곡이라고는 하나 마음이 지쳐서 그런가 싶어 슬며시 걱정된다. 2030 세대들의 은둔생활들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다. '더 잘할 수 있다'는 상상 속 자신과 '이것 밖에 안 되는' 현실 속의 자신 간의 괴리는 점점 커져간다. 청년을 방안에 가두는 우울한 은둔의 세상이다. 청년을 가혹하게 대하는 사회라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지만 아들을 통해 피부로 와닿게 느끼곤 한다. 택배를 하던 아들이 푸념한다. 의외로 젊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대한다는 것이다. 반말을 하거나 자기 상품이라며 들고 있던 상품을 뺏어가듯 가져갈 때면 아들은 감정적으로 격해져 힘들어하곤 했다. 다들 자식을 키울 텐데 예상외로 젊다고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사회적 경험이 적은 젊은 층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세사기나 금융사기 등 너무 흔해진 사건들은 기성세대가 그들을 경멸한다는 증거다. 젊은 세대가 나약하고 의존증이 크다고 탓하기에는 사회환경이 그들의 순수함을 이용해 먹으려 혈안이 된 양아치처럼 변해버렸다. 그런 세상 속으로 먹고살라며 아들의 등을 차마 떠밀어낼 자신이 없다. 걱정스러워 아들의 방문을 빼꼼히 연 나는 그저 아들을 안으며 등을 두드려주는 것밖에 할 수가 없다. 사랑하는 아들이 언제까지 함께 할지 모르겠지만 상처받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해지는 요즘이다. 자꾸만 나를 닮은 분신 같은 아들을 보고 또 보게 된다.


바쁘게 배송을 하고 다시 짐을 챙기러 걸음을 재촉하는데 저 멀리 뒷문이 활짝 열린 포터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한 평도 안 되는 짐칸의 저 공간으로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구나. 아내와 아들이 각자의 짐을 챙겨 들고 바쁘게 아파트 건물 속으로 사라졌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무심하게도 유난히도 맑고 청명하다. 가슴이 시렸지만 이내 감사해졌다. 서글프기도 하면서 행복해지는 이상한 순간이다.


어쩌면 우리 가족은 지금 삶의 가장 깊은 크레바스구간을 지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가족이 함께 서로를 부여잡고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현실은 시리고 서글프지만, 내일을 향한 알 수 없는 희망의 손길이 자꾸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어준다. 그래서 또한 감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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