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반면에 바라본다는 것은 누군가를 경계하고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보다 우월한 존재가 지켜본다고 느끼게 할 수도 있다.
연매출 100억 정도 올리는 중견기업에서 잠시 근무했었다. 사장이 참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출장보고 등 매일 제출해야 하는 각종 보고양식이 열 가지 정도는 되었다. 압권은 사무실내에 CCTV를 설치해서 직원들 근무상황을 지켜본다는 것이다. 그는 직원의 모든 것을 알려고 했다. 늘 누군가의 감시와 통제를 받는다는 사실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모든 것을 힘겹게 버텨내야 하는 지옥이 따로 없다. 결국 퇴사가 줄을 잇고 직원들이 부지런히 들고나는 그런 회사가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역시 지켜보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거대한 정보와 자본을 앞세운 기업과 시장은 한층 정교해진 "파놉티콘(panopticon, 제레미 벤담이 제안한 망루형 공장 겸 감옥)"을 완성시켜 소비자인 우리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분석하며 완벽히 조종하려 부산하다. 겉으로는 선택의 자유가 무한히 허용된 축복의 세상처럼 보이지만, 비참한 가난 속에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TV속에서 쏟아내는 흔한 음식조차 선택할 권리가 없다. 직업선택의 자유도 경제불황이나 일자리가 없을 때는 무용지물이다. 선택할 기회를 박탈당한 삶은 늘 흔들리고 불안하다. 사람들은 "처량하고 귀찮고 무의미하게 보이는 판박이 같은 것들"로 변해버린 일상을 그저 버티고 감내할 뿐이다. 결국은 허무의 수렁 속으로 깊이 빠져든다.
그것들을 버티기 위해서는 심장박동 사이의 공간에 쭈그리고 앉아있을 수조차 없어 그 박동들 각각에 벽을 치고 거기서 살아야 했다. 머리 들고 위를 보지 못하게.
직장이든 사회에서든 우리는 지켜보며 통제하려는 음울한 시선들 앞에 주눅 든 채 살아간다. 우리는 현재 맞닥뜨린 이런 불쾌한 상황에 대한 생각과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순간에 대해 통제하는 능력을 사용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애써 현실을 외면하려 주위에 벽을 치고 그것도 모자라 심장박동 소리의 찰나의 순간까지 비집고 들어가 벽을 세우고 그 속에 움츠려 버텨내려 한다. 달리 선택할 길이 없어 그저 그렇게 권태로운 하루를 살아낸다. 우리는 영원히 소비지옥과 직장감옥 속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일까?
04. 바라보는 것은 강력한 행동이다. 무엇인가를 더 알고 싶은 갈망을 의미하기도 한다.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나는 지금 한그루의 거대한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다. 메타세쿼이아는 웅장한 왕관을 쓴 25m가 넘는 거대한 나무이다. 그 거대한 덩치를 지탱시키는 것은 튼튼한 뿌리이다. 땅속을 뚫고 강바닥까지 내려간 기나긴 뿌리줄기들은 생명의 원천인 생수를 부지런히 빨아들인다. 강바닥을 헤집은 뿌리와 자갈더미를 서식지로 삼고 공생하는 생명체가 있다. 칠성장어는 긴 원통형의 몸을 가졌고 입은 아래쪽으로 약간 굽은 주둥이의 끝에 있다. 턱이 없고 입빨판을 가진 기형적인 외모를 지녔다. 각질성 원형의 이빨들은 매우 날카롭다. 바다에서는 입빨판으로 다른 물고기의 체액을 흡입해 먹으면서 성장한 후, 강으로 올라와 산란하고 죽는다. 외형적으로 볼품없고 가진 기술이라고는 입빨판으로 빨아대고 기생하며 사는 처지라 비루해 보이기 그지없다. 하지만 바다에서 성장한 후 강기슭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지, 그 과정을 보잘것없는 입빨판 하나로 경이적으로 극복해 내는 사실을 알게 되면 칠성장어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게 된다. 크고 작게 역류하는 물살은 물론이고 댐 같은 거대한 장애물도 변변찮은 흡입기술만으로 극복해 낸다. 험난한 회귀의 과정을 끝내고 기진맥진한 칠성장어는 서식지에 도착하면 산란을 한다. 그리고 뿌리와 자갈이 엉킨 강바닥에서 서서히 죽어간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던 독수리의 먹거리가 되면서 일생을 마친다. 지금 칠성장어가 죽어가는 서식지는 거대한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생존하는 근원이다. 그곳에서 태어난 칠성장어 새끼들은 또 다른 생존을 시작하며 큰 바다를 향할 꿈을 꾼다.
한낱 미물인 칠성장어도 볼품없는 흡입능력만으로 눈앞을 가로막는 무수한 장애물에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인간은 선택 가능한 상황만을 기다리며 행동하기를 망설인다. 니체는 인간은 우주에서 유일한 행동 주체이기에 "우리 스스로 신이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모든 상황을 초월하는 초인(超人)이 되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영혼에 과중한 짐만 부여할 뿐이다. 오히려 인간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주저하고 불안해하며 사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극복하는 측면에서 생각이 많은 인간은 회귀본능에 충실한 칠성장어보다도 열등한 처지로 전락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징표인 생각하는 능력이 오히려 인간의 발목을 잡았다. 생각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다. 무엇이 옳은 생각이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확실성을 상실했기에, 인간은 눈앞에 크고 작은 삶의 장애물이 나타날 때마다 주저하고 회피를 선택할 뿐이다. 눈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너머를 향해 서식지에 대한 칠성장어의 확신과 갈망이 인간에게는 없다. 상황을 통제하고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상실한 채 상품과 정보를 소비하는 가축으로 퇴화하는 중이다.
상황을 변화시키고 통제하는 힘을 다시 회복할 수는 없을까?
빅터 프랭클박사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상상하는 것으로 끔찍한 현실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상상하는 과정을 통해 내면세계를 극대화시켜 현실 속 자기 존재의 공허감과 고독감, 그리고 영적인 빈곤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과거의 행복했던 어느 한순간, 또는 미래의 가슴 벅찬 순간을 상상하는 것으로 끔찍한 현실상황을 헤쳐나갈 힘을 얻게 된다고 했다. 상상하는 것으로 <죽음의 수용소>에서 생존한 것처럼, 갇힌 삶의 암울한 현실상황을 벗어낼 수 있으리라.
나는 상상하며 과거의 나와 미래의 또 다른 나를 바라본다. 이 순간 우리는 함께 어우러져 글을 쓰고 있다. 과거의 내가 쓴 글들을, 현재의 내가 읽으며 보태고, 미래의 내가 수정하고 더한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한 마리의 고양이가 되었다. 갇힌 삶의 무게와 현실의 불안함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감춰진 야생의 둔탁한 발톱을 빼내어 들고는 힘차게 스크레치를 해댄다. 글쓰기는 내 삶의 스크래처이자 삶을 향한 나의 야성을 되찾으려는 상상 속 단련장이다. 내 책상아래 먼발치로부터 칠성장어 한 마리가 꼬물거리며 한 글자, 한 글자씩 찍어대며 용감하게 올라온다. 책상 위에는 어느샌가 우람한 메타세쿼이아 나무 한그루가 막힌 천장을 시원스레 뚫어버리며 열심히 위로 피워 올랐다. 나는 벅찬 감동으로 깊어가는 밤을 잊어버린 채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