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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

이기심, 상상력 그리고 동감

by 코나페소아

이기심은 경제를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는 말했다. 비딱하니 '이기적이라야 제대로 밥 먹고 살 수 있다'라고도 읽힌다. 그래서일까 택배로 벌어먹고 사는 현장에도 예외 없이 이기적인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실수가 많은 택배초기에는 퇴근 후 밤시간은 공포스러웠다. 밤 10시나 새벽 1시에도 전화를 하는 고객들이 있어 택배기사의 퇴근 후 사생활은 늘 불안했다. 전화 없이 잔잔히 지나간 그날 밤은 그야말로 "고요하고 거룩한 밤"이었고 저절로 감사하기까지 했다. 고객 나름의 합당한 사유가 있겠지만 택배기사의 사생활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듯한 행태에 속상했다. 지금은 새벽에 일찍 나가야 하는 업무 특성상 수면시간을 나름 지켜내야 하기에 늦은 밤과 새벽녘의 고객응대는 가급적 문자메시지로 받아 처리한다. 하지만 아직도 간혹 새벽이나 밤늦은 시간에 전화가 온 흔적들을 보면 기분이 씁쓸해진다.


한 번은 점심 나절에 한참 배송 중이었는데 계속 상품이 언제 오냐는 연락이 왔다. 오늘 점심에 먹으려고 소고기 냉동 한 박스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점심도 거른 채 배송 중인데 참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중하게 제가 끼니를 거른 채 배송을 해도 고객님 식사시간에 맞춰 배송해 드리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주말 토요일 캠핑을 가려고 상품을 기다리는 중이라며 언제쯤 도착하냐는 연락이 계속 와서 다른 배송을 하는데 신경이 쓰이고 배송시간이 지체되는 등 여러모로 애먹었다.


고객 한분이 택배상품을 직접 찾으러 왔다. 택배는 싫든 좋든 탑차 안에 쌓인 상품의 순서대로 배송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쌓인 상품박스들을 한동안 헤집으며 깊숙이 자리한 상품을 힘들게 꺼내 전달해 드렸더니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고객분이 미안해하며 상품을 찾아갔다. 그분이 떠난 후 한동안 배송을 멈춘 채 다시 상품을 적재해야만 했다.


이런저런 요구들로 인해서 택배기사의 시간은 늘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리한 요구에 시달리는 날이면 배송하면서도, 끝나고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도 정신적으로 침체되고 우울해지곤 했다.


주소를 잘 못쓰거나 아파트 동호수가 누락된 상품을 제대로 배송하는 일은 바쁜 배송 중에 번거롭고 힘든 일중에 하나이다. 배송을 멈춘 채 수차례 전화하고 확인해야 한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 문제는 전화를 해도 통화가 안되거나 힘들게 통화가 되어도 필요한 주소나 동호수만 알려주고는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뚝 끊어 버리거나 빨리 배송해 달라고 독촉하는 경우도 있었다. 애쓰고도 냉대당한 것 같아 참 황당해지면서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건빵봉지 속에는 퍽퍽한 건빵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별사탕도 존재하기에 건빵에 자꾸만 손이 가는 것처럼 별사탕 같은 고객들은 사람이 힘겨워지는 순간마다 신선하게 등장하곤 했다. 무더운 날 고생한다며 챙겨주신 음료수는 왜 그리 시원한지 모르겠다. 커피전문점으로 주문된 몰짐을 배송하는데 주인분이 유심히 보더니 커피 한잔씩을 권했다. 그러더니 우리들 각자의 취향대로 커피를 따로 만들어 주셨다. 배려란 받아 든 커피는 차갑고 시원한데 마음은 자꾸만 따스해지는 건가보다.


반품을 회수하러 가면 상품이 없거나 맨 박스나 비닐포장만 된 채 문 앞에 내놓아진 경우에는 전화해서 상황을 파악하느라 애를 먹곤 했다. 반품상품은 택배기사가 알아서 챙겨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반품박스에 포스트잇이나 매직 팬으로 반품할 상품명과 택배사 이름을 적어주시는 고객분들을 만나게 되면 배려받는 느낌이 들면서 참 감사해진다. 반품을 못 내놓은 경우 미리 문자로 알려주시기도 한다.


크고 무거운 짐들을 여러 건 배송해야 하는 몰짐이 있는 날이면 힘이 더 많이 든다. 수레로 여러 차례 왕복하며 날라야 하기 때문이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다가와서는 짐을 같이 나르며 돕는 분들도 있다. 어느새 옮겨진 짐들을 보면서 사람에 대해 식어가던 마음판의 온기가 다시 되살아남을 느끼게 된다.


같은 공간,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아가는데 누구는 이기적으로 살고 어느 누구는 배려하며 사는 걸까.

배려심 많은 사람들은 이기적인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그런 마음을 배웠을까.


상상을 통해 고통을 받는 자와 입장을 바꿔봄으로써 우리는 고통을 받는 자가 느끼는 것을 느낄 수 있거나 또는 그가 느끼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지만 상상하는 능력을 통해서 다른 이와 공감하고 감정적 일체감을 경험할 수 있다. 상상하는 능력은 이기적인 인간을 이타적인 존재로 변화시키는 유용한 도구이다.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 타인을 바라보며 내가 처한 입장으로 상상하며 그와 똑같은 감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한편으로 스미스가 주장하는 <동감하는 삶>이 그리 단순하거나 행동에 옮기기 쉬운 것은 아니다. 변화는 가슴에서 시작되지만 인간관계는 발에서 완성된다는 말처럼 스스로에 대한 희생과 인내가 요구된다.


내가 배송하는 구역에 청각장애자 부부가 있다. 통화를 할 수 없어 한참을 문자로 상황을 주고받으며 배송업무를 진행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정신적인 장애도 있는지 어떤 때는 상황에 맞지 않는 문자들을 장시간 보내오기도 했다. 배려를 하려는 첫 마음이 바쁜 배송 중에 점차 짜증으로 변해버린 본래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 역시 철저한 이기적인 존재였음을 알게 되었고 나에게 배려를 베푼 고객들은 이 같은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당했다는 사실이 깨달아지면서 새삼 다시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애덤 스미스는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상실한 인간은 광인(狂人)이 되는 것이며 이것은 가장 큰 재난이며 비참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먹고살기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가더라도 타인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능력을 상실해서는 안된다는 "자본주의의 아버지"의 유용한 유언을 이기적인 현실은 애써 외면한다.




그가 말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이상적인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졌다.


문득, 사진작가 프랜시스 존스턴의 남자 여섯 명이 계단을 만드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생각났다.


여섯 명이 한 공간에서 각기 다른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아무 표정 없이 각자 자신의 하는 일에 몰두하는 그들의 얼굴은 고요하기만 하다. 각자가 일하는 태도는 긴장되지도 않고 느슨해 보이지도 않지만 서로에 대한 격식이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각기 다른 기술과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하지만 작가의 눈에는 하나의 계단이 체계적으로 협업 속에 완성되어 가는 과정으로 보여진다.


나 자신이 이기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눈에 띄게 유익한 점은 이기적인 다른 사람이나 세상에 대한 미워하거나 비난하는 감정이 많이 누그러진다는 점이다. 그런 입장의 동일함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처지를 상상하며 서로 관계를 맺을 때 새로운 변화가 생겨나지 않을까 싶다. 스미스는 이런 이기적인 인간들의 교역이야말로 번영을 가능케 하는 전문성의 원천이라고 설명했다.


상대에 대한 입장을 상상한다는 건 우리 삶의 부조리한 모순들에 대해 조용하지만 가장 힘있게 저항하는 행위가 아닌가 싶다. 사람은 보려고 하는 만큼만 볼 수 있다. 보이는 현실과 사람들 모습에서 멈추지 말고 여기에 상상력을 보태면 더 넓게 많은 걸 볼 수 있게 된다는 노학자의 진지한 설득이 자꾸만 오랫동안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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