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Justitia)는 대개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쥐고 있다. 여기서 저울은 개인 간의 권리관계에 대한 다툼을 해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택배현장에도 저울을 든 여신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녀는 택배기사에게 공정한 권리관계를 해결해 주기보다는 철저한 <을의 처지>와 배송할 짐의 씁쓸한 <헐값> 실체만 확인시켜 줄 뿐이다. 택배의 기본적인 무게는 쌀 한 가마니 20kg 기준이다. 하지만 그보다 상회하는 30,40kg에 육박하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무거운 무게임에도 운임이 2,3천 원으로 책정되어 오는 경우도 자주 있다. 택배초보일 때는 당연히 무거운 것은 운임을 더 줄 것이라 여기고 배송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화가 났다. 그래서 배송을 거부하고 되돌려 보내면 어김없이 클레임이란 명목하에 만원, 이만 원을 부과당하고 만다. 이럴 때면 힘없는 택배기사의 처지가 참 서글퍼진다. 특히 주요 화주사의 상품일 경우에는 비합리적인 배송운임이라도 무조건 수용해야 하는 분위기다. 물론 정당한 항의절차가 있지만 택배기사가 직접 전화하고 따지고 하는 등 번거로운 과정만 있을 뿐이다. 배송할 상품을 받고, 실고, 배송하기에도 정신없는 택배기사 입장에서는 참 많이 힘들고 번거로운 일이다. 90% 이상의 택배기사는 그냥 수용하거나 클레임을 당한다.
택배레일 위로 쏟아져 내리는 고양이모래, 두유, 시슬러세제, 베이비기저귀, 쌀, 감자박스, 옥수수자루, 소금자루, 두루마리휴지세트, 욕조, 음료수박스 등을 받아내며 택배기사의 신음 섞인 한숨이 터져 나온다. 이 같은 짐들은 받아내며 힘쓰고, 차에 실으며 힘쓰고, 차 안에서 옮기며 힘쓰고, 배송하며 힘쓰는 등 최소 네다섯 번 이상의 힘을 쓰며 배송을 해야 한다. 하지만 간혹 이런저런 사유로 <무조건 헐값>에 배송해야 하는 상황이면 육체적, 정신적 피로도가 겹쳐지며 저절로 입에서 욕이 나온다. 택배를 하면서 <욕의 긍정적 의미>를 배웠다. 욕은 이런 상황들을 견뎌내게 하는 진통제 같다. 참고로 우리는 택배 하기 전에는 욕설을 내뱉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곁에 욕하는 이들이 있으면 벌레 보듯이 멀리 피해버렸던 우리가 이젠 자연스레 욕을 한다. 아들도 처음에는 눈치를 보더니 무거운 짐 앞에서는 내 앞에서도 욕을 한다. 너무 힘든데 견뎌는 내야겠고 안간힘을 쓰다 보면 자연스레 터져 나온다. 욕이란 택배기사에게는 안간힘 쓸 때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다.
택배기사가 받는 상품 한건당 운임 700~800원에는 어떠한 불공정한 조건의 무거운 짐이라도 오직 <욕> 하나로 참아내야 한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 사람들은 500만 원, 천만 원이라는 택배기사 월급에만 초점을 맞추지 그 이면에 감춰진 죽어나갈 정도로 힘겨운 현실은 외면한다.
무거운 짐들이 많이 나오는 날이면 나는 자주 저울의 여신을 찾는다. 그리고 그 앞에서 한참 고민에 빠진다. 얼토당토않은 운임과 과중한 무게를 보면서 되돌려 보내고 자존심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그냥 참고 배송을 해야 하나를 고뇌한다.
사랑하는 고양이에게 깨끗한 모래를 전해주고, 시골의 건강한 먹거리 감자, 옥수수 등을 어르신들에게 전해드리고, 귀여운 아가에게 뽀송한 기저귀를 전하는 나는 <소명받은 긍정적인 택배기사>이고 싶지만 내가 가진 팔다리가 그런 이상을 따라가기에는 너무나 약하고 아프다. 죽을 것만 같다. 택배 하기 전에는 운동과 택배는 같다고 착각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운동은 건강을 위해 하고 안 하고를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택배는 건강을 해치더라도 무조건 해내야 하는 선택권이 없는 일이다. 좀 더 실감 나게 설명해 보자.
30kg에 육박하는 무거운 김장김치를 계단으로 겨우 가져다 놓았더니 거칠게 박스를 내던졌다며 항의하는 고객 앞에서 그저 사과할 수밖에 없고, 비가 몹시 오던 날 무거운 세제를 배송하다가 상품도 나도 홀딱 젖어버렸지만 젖은 상품만 걱정하는 고객 앞에서 택배기사는 물건보다 못한 존재임을 인식할 때 느껴오는 비애감은 운동할 때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배송하는 구역은 신축 아파트, 구축 아파트, 빌라, 상가 등 다양하다. 연세가 많거나 서민들이 사는 곳일수록 농산물이나 생활용품들이 많다. 이것들의 특징은 마대자루 등 박스가 아닌 비정형적인 형태에 무거운 상품들이 많다.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무거운 상품들을 들 때마다 나이가 들수록, 돈이 없을수록 무거워지는 삶의 무게도 같이 느끼게 된다. 그래서 무게에 따라 택배운임을 더 많이 받는다는 건 서민의 삶을 더 고달프게 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서민을 위한 농산물 등에 대한 택배운임에 대한 지원이나 택배단가의 합리적 조정이 필요해 보인다.
택배기사가 일하는 현장에 살고 있는 정의의 여신이 지닌 저울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다른 한 손에 든 칼도 일방적인 수용만을 강요하는 상징일 뿐이다.
엄마아빠와 함께 일 년 남짓 택배를 해본 막내아들이 한마디 툭 내뱉었다. "우리 가족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고생을 하며 사는 거야?"
분명 잘못된 말이지만 우리는 적절한 대꾸를 찾아 나무라지 못했다. 아니 부끄러웠다. 스물세 살짜리 순수한 영혼에게 <그저 먹고살기 위해서 참고 해야 하는 거야>라고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택배현장에는 또 한 명의 여신이 존재한다. 운명의 여신 <포루투나(Fortuna)>이다. 중세 로마시대 여신인 포르투나는 특정인에게 기울어지지 않도록 둥근 공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눈을 가린 채 아무에게나 행운의 금화를 뿌려대는 속성을 지녔다. 눈먼 행운의 여신. 그녀는 누가 혜택을 입을지에는 무관심하다. 그녀에게는 <도둑놈이 복권에 당첨되는 현실>도 지극히 타당하다. 그래서 로마의 스토아학파는 삶 속에 불합리하게 벌어지는 행운과 불행에 대항하기 위해서 금욕과 자제심을 키우고 스스로를 세뇌시켜 삶의 흥망성쇠를 이겨내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눈먼 행운>이 우리 삶의 과정을 결정한다고 여기는 이런 생각은 사람을 허무주의에 빠지게 한다. 우리 삶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으며 우리는 그런 무의미한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로 여기게 만든다. 택배현장에 행운의 여신은 짙은 여운을 남기며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닌다.
택배레일이 돌아가는 순간 택배기사들은 행운의 여신에게 무거운 짐들이 나에게 오지 않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무거운 몰짐이나 깨어진 아이스박스나 터진 농산물박스를 받아 들게 되면 마냥 흔들리는 멘털을 간신히 부여잡고 부지런히 테이핑 하느라 여념이 없다. 레일 위로 눈에 띄게 크고 무거운 상품이 흘러오는 순간 다들 긴장하며 바라보다가 자신의 앞을 지나는 순간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그리고 행운의 여신에게 선택받은 이가 누구인지를 모두가 지켜본다. 포루투나는 잔인하다. 무거운 짐들이 많이 나오는 날이면 반품도 여지없이 크고 무거운 것들만 선사한다. 무거운 짐들을 받고 쌓는 동안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택배기사는 배송 전에 이미 60~70%의 힘을 소모할 수밖에 없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나 저층 아파트, 복도식 아파트를 배정받으면 체력소모는 크고 배송시간은 길지만 수입은 낮은 경우가 많다. 택배를 처음시작하거나 새로 입사를 하는 경우에는 이런< 똥구역>에서 일이 년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결코 <꿀구역>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기다리고 견뎌야 한다. 차라리 <꿀구역>을 포기하고 <똥구역>들만 모으고 모아 수입을 높이는 것이 힘들지만 더 현실적일 수도 있다. <눈먼 행운>을 기다리다가 굶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들 택배는 구역빨이라고 하는데 택배배송 실력에 상관없이 뚝 떨어진 지하철역사나 학교에 한 개의 상품을 달랑 들고 배송하러 이삼십 분을 소비해야 하는 경우에는 배송시간은 엿가락처럼 마냥 늘어난다. 더 힘들게 더 많이 일한다고 운명의 택배여신은 더 많이 벌게 해주지 않는다.
이런 잔인한 <운명의 여신>의 영향력 때문인지 택배기사는 내 짐이 남의 짐보다 늘 더 커 보인다. 곁의 택배기사의 고충에 대한 공감대가 많이 떨어진다. 내가 짊어지는 무거운 짐은 서러운데 곁의 동료기사가 짐이 무겁다며 하소연하면 "다 돈인데 뭘 그래?" 하며 위로보다 핀잔이 우선이다. 돈을 앞세우고 무차별로 살포하는 행운 앞에 노출된 관계에서는 진정한 공감대를 기대하기 어렵다. 서로의 약점을 드러내고 보듬는 그런 정조의 세상이 아니다. 가급적 약점 잡히거나 약한 소리를 결코 서로 하지 않는다. 고통지수와 돈을 맞바꾸는 직업이다. 한 달 치 월급을 미뤄서 지급해도, 파손분실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전가해도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눈먼 행운의 여신이 정한 합리적인 룰이니깐 말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세상 속에서는 그저 자기기만과 자기 합리화에 빠져 살기 쉽다. 택배일은 자기기만과 자기 합리화로 스스로를 세뇌시켜야 그나마 견디기 쉬운 그런 허무성이 짙게 묻어난다.
하루는 힘들게 배송을 다 끝내고 빨리 집으로 귀가하려는데 생물상품이 추가로 발견되어 다시 해당 아파트로 한참 되돌아가서 재배송해야 했다. 그다음 날 또 배송을 마친 후 귀가를 서두르는데 이번에는 우리가 당일배송해야 하는 생물상품을 오배송했다는 고객연락을 받고는 부랴부랴 다시 배송하러 간 적이 있다. 포루투나는 결코 우리가 택배를 쉽게 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항상 배송을 하다 보면 해당아파트 동을 지나쳐서 고개를 내미는 얄미운 상품들이 꼭 생겨난다. 가족들이 배송하면 내가 그놈들을 다시 배송하러 지나쳐온 곳을 가는데 꼭 가장 멀리 있는 동, 가장 꼭대기 층이다. 더 환장하는 건 막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 올라가 버리는 경우다. 반대로 다행히 저층이다 싶으면 꼭 꼭대기층 사는 입주민이 같이 타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면 참 택배로 벌어먹기 쉽지 않구나란 탄식이 절로 나온다.
택배기사는 운명의 여신에게 각종 시비다툼에 휩싸이지 않기를 기도한다. 택배는 늘 시비다툼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상고객을 만나거나 엘리베이터 등에서 시비가 붙지 않기를 늘 긴장하며 배송하게 된다.
배송구역인 아파트에서 함께 배송하던 다른 택배사 부부가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남편 혼자 배송했다. 이유를 알아보니 배송 중에 입주민들과의 엘리베이터 사용문제로 잦은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몇몇 입주민들의 과격한 항의에 트라우마를 겪고는 부인이 더 이상 배송을 못하겠다며 남편에게 하소연했다는 것이다. 우리도 배송 중에 엘리베이터에서 크고 작은 시비가 있었다. 음식배달하는 배달원이나 입주민들, 같은 택배기사들끼리도 시비가 발생할까 늘 마음 졸이는 경우가 많다. 나름 시비가 발생하지 않도록 대신 배송해 주거나 입주민이 내리고 난 후 배송하는 등의 방법을 쓰기도 하지만 늘 시비가 발생될 우려가 있어 긴장한다.
하지만 잔인한 운명의 여신은 물류센터에 물건을 배송하러 간 우리를 큰 시비에 휘말리게 만들었다. 평소처럼 상품을 내려놓는 순간 직원 한 사람이 왜 물어보지도 않고 상품을 이곳에 내려놓냐며 시비를 걸었다. 그 과정에 나에게 고함을 치는 그를 지켜보던 아들이 거칠게 항의를 했다. 그가 아들에게 다가서려는 순간 내가 급히 막아서자 갑자기 그의 동료들이 떼거리로 우리에게 덤벼들었다. 아내는 그만 비명을 지르며 놀라 쓰러지고 나는 급히 경찰과 구급차를 불렀다. 아내가 응급실에 실려가고 간단한 조사를 마친 나는 아들과 함께 다시 택배를 돌려야 했다. 아내와 통화하니 응급실에서 진료 중이라는 말에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탑차에 실린 짐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무조건 배송해내야만 하는 게 택배기사의 운명이다.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너덜너덜해졌지만 모든 걸 잊고 배송에만 다시 집중해야 했다. <이렇게 하면서까지 먹고살아야 하나>라는 회의가 진하게 생겨났다. 늘 조심하지만 잊을만하면 크고 작은 시비에 늘 노출되곤 한다. 아내는 물류센터 등 지번을 이 기회에 하지 말자고 말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아직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기적인 하늘아래서 택배를 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절하게 체감하는 순간이다.
삶은 내 맘 같지 않고 늘 제 멋대로다.
까뮈는 현실은 이처럼 부조리하다고 표현했다. 내 맘 같지 않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그것이 잔인한 운명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는 비결이라고 한다. 삶의 부조리를 비웃으며 현재에 충실하는 것. 그것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의미 있게 반항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반항하는 인간은 "아니다(non)"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반항하는 인간은 거부를 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알베르토 까뮈>
지친 아내를 먼저 재운 후 멈춘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어 널었다. 식탁에 앉아 커피 한잔을 하는데 늘 부조리하게 반복되는 삶을, 멈춤 없이 계속 달려 나가야 하는 이 삶을 얼마나 더 감당할 수 있을까란 회의가 짙게 피워 오른다.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까지 올렸다가 다시 반복해서 올려야 하는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인 <시지푸스>는 저항의 상징이다. 까뮈가 칭송한 그런 시지푸스도 현실의 택배세계에서는 "입스(yips)"에 빠져 버릴 것만 같다. 특정한 동작을 의식적으로 잘하려고 할수록 그것을 할 능력을 잃어버리는 무기력한 현상을 말한다.
정신과의사인 숀 하비는 뛰어난 선수들이 무기력증에 빠지게 되는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냥 반복적으로 하면 되는 일에 대해 과도하게 생각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세부사항들을 따져보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결국 그토록 오랫동안 쉽게 해 왔던 일들을 수행하는 능력을 스스로 파괴하게 된다.
잘 견뎌내려 애쓸수록 인간은 무기력해진다. 그냥 과도한 생각을 멈추고 내 앞에 펼쳐진 삶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내면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행동에 스스를 내맡긴다. 그것이 제멋대로 굴러가는 인생을 향한 최고의 반항이다.
다음날 다시 돌아가는 레일 곁에 섰다.
택배레일 곁에서 휠소터가 웅웅 거리며 토해내는 상품들을 보노라면 세상 돌아가는 일도, 경제도, 정치도 세상만사가 잊힌다. 택배로 인해 다양한 문화와 격리된 삶이지만 마음은 편안하고 평온해진다. 내가 느껴진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마약김밥과 간식거리를 챙겨 왔다. 아내와 함께 우리들은 수다를 떨었다. 다시 쏟아지는 무거운 짐들을 받다 보니 어느새 다시 새로운 힘이 스며 나옴을 느끼게 된다. 다시 앞으로 나갈 힘과 희망을 믿으며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해 본다.
요즘은 간선차가 지연되는 한 시간 동안 글을 쓰며 이런 제멋대로인 현실에 저항을 한다. 생생하게 실감 나는 택배현장은 이제껏 내 생에 경험 못할 귀한 글감들을 제공해 준다.
택배를 하면서 그 어떤 상황에도 나는 함께하는 가족을 가지고 있다는 행운을 발견했다. 사랑스러운 아내와 든든한 아들들이 함께 있는 한 삶이 제멋대로여도 살아나갈 수 있고 살아 나가야 하는 이유가 된다.
먹고살기 위해 악착같이 저항하며 살아나갈 것이다.
남들에게 삶이 비루해 보이고 구차해 보여도 가족과 미래의 꿈을 위해 택배를 부여잡을 것이다.
이것이 아들에게 들려줄 내 대답이다.
삶은 늘 그랬던 것처럼 부조리하다. 그런 삶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와닿는다. 그 의미를 택배 레일 곁에서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휴일에 마음을 다듬고 생을 얼마 안남기신 아내의 구순의 외할머니를 마지막생전에 찿아뵙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