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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기사가 20일 동안 천만 원 벌었다고요?

일상표면에 머무르며 사는 능력.

by 코나페소아

3일간의 연휴가 꿈결같이 지났다.

다시 택배현장으로 돌아오니 평소보다 많은 물량을 소화해야 했다. 택배를 한 이래로 가장 많은 짐들을 받아내고 배송하느라 우리는 힘들었다.

가장 많은 물량을 소화해 낸 그날. 우리는 잠시의 성취감을 느낀 후에는 파김치가 되어 각자의 방으로 조용히 헤어져 쓰러지듯 잠들어 버렸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도 체력이 필요하다.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연휴 후에 몇 주간 엄청나게 늘어난 물량을 직접 처리해 보니 욕심 따라 일하다가는 모두 쓰러질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겨났다. 최근 매스컴에서 <택배기사가 20일 동안 일해서 천만 원 벌었다>는 기사내용이 화제다. 일평균 500개 이상 물량을 소화해야 한다. 농산물 등 무거운 상품을 배송해야 하는 내가 일하는 택배회사에서는 일평균 350개도 이렇게 힘겨운데 상상하기 힘든 물량이다. 가능은 하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목숨과 맞바꿔야 할 수준이라 여겨진다.


사람들은 기사내용 중에서 월수입 천만 원이라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기사내용 이면에 깔린 택배현장에 늘 맴도는 노사갈등과 불안감, 불합리한 시스템 속에서 오롯이 택배기사가 감당해 내야 하는 배송에 대한 중압감 들은 전혀 읽어내지 못한다. 셀리리맨들의 수입은 한계가 정해져 있다. 수입의 한계가 없다는 사실이 매력적이겠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무서운 교훈이 있다. 생명을 욕심과 맞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원하던 배송량에 도달할수록 그만큼 혹독한 고통을 감당해내야 한다. 돈과 목숨을 바꾼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어졌다. 욕심이란 내 팔이 닿을 수 있는 범위만큼만 부리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내가 가진 모든 체력을 배송에 다 쏟아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녹초가 될 수밖에 없다면 희망하는 목표량은 조절되어야 한다. 천만원보다 일상에는 소중한 일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택배를 하기 전 회사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책상 모니터 앞에만 앉아있던 날이 생각난다. 몸은 지루할 정도로 편안했지만 늘 마음은 불편하고 불안했다. 50대를 바라보는 처지에 상승곡선이 아니라 현상유지만이라도 했으면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수입이 현상유지만 될 수 있다면 전부를 갈아 넣고 싶은 생각이었다. 중년취업 현장에서 만난 사람이 흘린 한마디가 아직도 생각이 난다. "200만 원이라도 벌어봤으면 좋겠다." 당시 그분은 60대에 가까운 나이였고 열심히 취업박람회 등을 찾아다니며 구직하던 명문대 출신이었다. 당시에는 민망하게 여겨져 외면했지만 절실한 심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다고 여겨진다. 마음이 200만 원에도 간절해지는데 천만 원이라면 오죽할까.


하지만 수입 천만 원도 가능할 지점에서 녹초가 되고 파김치가 된 내 모습과 가족을 바라보고 있자니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돈이 없는 현실의 처절함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돈이냐 삶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는 당혹해하며 머뭇거리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신성한 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변화될 수밖에 없으며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진리란 불변이라고 믿는다. 진리란 일상 속에 숨겨진 것이거나 그 너머에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신념은 흉물스러운 아집 또는 오만으로 변해간다. 상황과 처지에 따라 진리는 다르게 표현되며 그런 변화무쌍함을 수용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겸허해지는 게 인생 아닐까 싶다.



일상의 표면에 머무르며 사는 능력, 즉 일상 속에 감춰진 목적을 찾는 대신에 그것이 선사하는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 이미 주어진 행복과 즐거움을 발견하는 능력, <표면에 머무르며 사는 능력>이 요구된다. 인간이란 어떤 경우에서건 자기가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기대치를 결국에 낮추거나 적어도 전환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결코 지성이나 상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심장, 침대, 식탁, 안장, 난롯가, 그리고 전원 등에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빛난다 / 휴버트 드레이퍼스, 숀 켈리>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 입사 후 몇 년간 잘 다니다가 퇴사했다는 지인의 자녀소식을 들었다. 해외에 한 달간 머무르며 여행을 다니고 있다고 한다. 다들 자유롭게 산다며 부러워한다. 그런데 잘 모르겠다. 명문대학, 대기업, 여행, 자유로운 선택 등 그런 정조 속에서 탈피해서 수도권 외딴곳에서 택배 하며 사는 지금은 그런 삶이 그리 부러워 보이지 않는다.


대리점에 2030의 젊은 택배기사들이 여러 명이 있다. 그들 중에 나름 수입을 늘리기 위해 택배 후에 오토바이 배달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말을 듣고 내심 놀랐다. 힘들지 않냐는 물음에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사기 위해 미리 돈을 모으려 일하는 건데 뭐가 힘드냐고 그런다. 일 년 전 높은 경쟁률을 뚫고 아파트청약에 당첨된 30대 초반 가장인 M은 대출금 등 상환금을 대기 위해 악착같이 배송하고 집하하는 모습을 보면 참 대견스럽다. S와 T는 총각인데 아파트를 이미 한 채씩 장만했다. 특히 T는 평소 짠돌이처럼 쓸데없는 비용지출은 안 하기로 유명하다. 늘 일을 더하려고 한다. 20대인 C는 효심이 깊다. 형제 중에 막내인데 자신이 홀로 사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 아파트를 마련하려 열심히 배송과 집하를 한다. 덩치는 왜소하지만 당차게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내는 작은 거인, 상남자라며 감탄한다.


몸을 쓰며 일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배송 후 따라붙는 통증에 힘겨워하는데 이 젊은 친구들은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려 일거리를 더 찾아 일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들끼리 돌아가며 십시일반 도와가며 주 5일 근무를 하는 여유를 만들기도 한다.


먹고사는 것이 인생의 큰 과제인데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나의 젊은 날보다 알토란 같은 성과를 이루며 사는 젊은 친구들을 보노라면 그동안 내가 가진 인생관에 대한 진리가 흔들린다. 남들 보기에 화려하거나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고생하며 사회적 약자처럼 비쳐 보여도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참 많은 도전을 받는다.


늘 상황 탓만 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그런 청년들을 보면서 곁에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인생낙오자가 될 것처럼 닦달해 댔던 막내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겉멋 들게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실속 있게 인생을 누리고 살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창가에 빗방울이 어려있었다. 밤새 비가 왔나 보다. 온몸에 통증이 느껴온다. 하지만 마음은 고요하고 편안하기만 하다. 캠핑 갈 때 쓰겠다며 사다 놓은 캠핑박스에 오늘 하루 일하며 먹을 음료와 간식거리를 챙겨 넣는다. 캠핑장 대신 아내와 캠핑박스를 들고 택배 하러 나섰다.


까대기 하던 중에 간선차량이 한 시간 정도 지연된다고 한다. 우리는 차 안에서 미리 점심을 먹기로 했다. 좁은 포터 안에서 싸 온 도시락을 먹으며 느낀 것은 참 맛있다는 것이다. 육체를 움직여 일하는 것은 밥심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늘 먹던 밥이며 반찬인데 맛이 다르다. 그리고 아내가 호박무침, 나물무침을 참 부드럽고 연하게 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상표면이 지닌 가치를 깨닫는 참 감사한 순간이다.


신성한 진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변화될 수밖에 없으며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글귀가 가슴에 와닿는다.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삶인지에 대한 정답은 없다.


장마철, 무덥고 습한 여름에 배송하기 위해 크록스 신발을 세트로 구입했다. 가족이 세트로 맞춰 신는 신발이 재미있기도 하고 자꾸 정감이 간다. 특히 아내의 신발은 흰색이라 배송 후 더러워지면 한 번씩 꼭 닦아준다. 휴일이면 나의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 세벌의 신발을 닦아서 햇볕에 고이 널어놓으며 다음 주 택배를 준비한다.



행복은 결코 지성이나 상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심장, 침대, 식탁, 음악, 책 그리고 크록스 등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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