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자동차와 충전소처럼 서로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돈다. 늘 벗어나고픈 족쇄와 같은 속박적 관계인 걸까, 아니면 살아갈 의미를 재충전받는 소중한 관계인 걸까.
영화 "코다(CODA)"의 주인공 루비는 가족이 모두 청각장애인이다.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가족들은 서로 수화로 의사소통을 한다. 가족과 함께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는 그녀에겐 늘 비린내가 묻어난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놀림과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노래는 루비에게 유일한 위안이다. 말 못 하는 가족과 일하는 망망한 바다에서 목청껏 소리 높여 부르는 노래 위로 마음속 응어리들을 털어낸다. 힘겨운 상황들이 선사해 준 음악적 재능을 루비는 뒤늦게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버클리 음악대학교로 진학하고픈 꿈을 꾸게 된다. 하지만 이때부터 가족은 그녀에게 족쇄가 되고 만다. 유일한 소통창구 역할을 하던 딸의 부재란 가족에겐 생계와도 직결되는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루비는 꿈과 가족이란 선택의 갈림길에서 힘겨워한다.
가족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일반적으로 따뜻하고 내편처럼 힘이 되는 이미지가 연상되지만 현실 속 가족관계는 그렇지 못하다. 서로에게 잦은 간섭과 비난으로 지속적인 상처를 주고받는 부담스러운 관계가 되는 경우가 많다. 속으로는 서로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이 있지만, 겉으로 드러난 현실에서는 서로를 대하는 <관계기술>에 무지해서 모진 악연의 관계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다.
가족이 사랑과 관심이라는 명목으로 강요하고 간섭하는 순간 벗어나고픈 족쇄 같은 관계가 되고 만다. 장미는 장미답게, 튤립은 튤립답게 피어나야 자연스러운 대자연의 이치는 가족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현실 속 가족들은 구성원들이 각자의 본모습 그대로를 인정해 주고 수용하는 법에 많이 무지하다. 서로 가족은 되었지만 부모자식 간의 건강한 역할과 서로 존중하며 대화하는 법 등을 그 누구에게서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들 역시 무지한 부모들처럼 아들들을 훈육으로 포장된 강요를 하며 키웠다. 튤립인 아이에게 장미처럼 살라고 요구했다. 세상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선망받는 장미의 정원 속에 들어가 살라고 요구했다. 아들들의 사춘기 시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워야 할 가족이 함께 하는 식사자리는 늘 긴장과 대치의 분위기가 형성되곤 했다. 부모에게 강요받는 자녀는 그것에 맞춰 거짓된 모습과 반항으로 자기 방어에 나선다.
튤립 같은 우리 막내아들은 사춘기시절에 장미처럼 키워지려 장미정원 속에 던져짐을 당했다. 아들은 그 속에서 삼 년간 이방인처럼 지내야 했다. 막내아들은 영화 속 주인공 루비처럼 이런 꽉 막힌 현실 속에서 <힙합>을 통해 위안을 얻었다. 가슴속 응어리진 울분을 랩으로 쏟아내며 힘겨운 순간들을 견뎌냈었다는 사실을 부모인 우리는 까맣게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외면한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고 믿어왔기에 무조건 대학을 졸업시키려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강요했다. 세상의 평판과 인정이 우선이지 아들의 적성과 성향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들은 삼 년간의 이방인 같은 삶을 살아야만 했다.
늘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반항적이던 아들이 졸업 후 힙합을 전공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힙합은 슬럼가에서 가난한 흑인들이나 갱단들이 쓰레기처럼 내뱉는 생소한 음악처럼 여겼다. 하지만 아들이 만든 힙합가사 속에서 대화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속마음과 고민들이 오롯하게 전해져 오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아들과 함께 택배를 하던 어느 날, 배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들의 첫 음원등록이 된 음악을 함께 처음으로 들었다. 차량 볼륨은 최대한으로 키워지고 아들은 몹시 흥분하며 웨이브를 타면서 노래 부르며 기뻐했다. 살아있는 아들의 본래의 모습을 곁에서 생생하게 지켜봤다.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아들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나와 아들은 서로에게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었다.
힘겨운 택배를 하게 되면서 대학복학을 포기한 아들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존재인지를 깨달으며 어느 순간부터 최고 명문대학교에 다니는 아들도 부럽지 않게 되었다. 힘겨운 짐들을 하나라도 더 들고 가려고 엄마의 짐을 뺏어 들고 달려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늘 소극적이고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던 아들이 섬세한 음악적 감성과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함께 택배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젊은 아이답게 능숙하게 택배 앱을 사용하고, 빠진 물건을 재차 확인하고, 물건이 없다는 고객의 화물추적과 며칠이 지난 배송한 상품에 대해 생생하게 기억을 해내는 등 택배현장 속에서 아들의 비중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그동안 몰랐던 아들의 진면목을 이렇게 새롭게 발견했다.
아마 내가 택배를 하지 않고 바람대로 사업에 성공한 가장이 되었다면 내가 경험해온 성공의 틀에 맞춰 성장해 주기를 아들들에게 강요했을 것 같다. 내가 성공한 방식으로, 남들에게 인정받는 방식으로 살라고 말이다.
택배를 하면서 나는 가장의 역할에 대해 새롭게 배워야 했다. 나보다 능숙하게 배송을 잘하는 가족 앞에서 이전의 아버지의 권위와 아우라는 불필요했다. 그저 가족들에게 물질적 요구를 충족시켜 주고 가장의 권위를 존중받던 과거는 버려야 했다. 가족들이 신속하게 배송하는 순간에는 그저 그들과 동일한 선상의 동료이자 지원자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정말 무결하고 힘 있는 모습과는 동떨어진 가장의 모습으로 가족 앞에 서는 연습을 해야만 했다. 부모는 삶의 현장에서 자식과 동일 선상에 서는 순간 비로소 부모의 권위를 내려놓게 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말보다 삶을 앞장서서 진솔하게 살아내는 모습으로 자식 앞에 서는 것이 가장 영향력을 지닌 훈육이 된다.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눈 오면 눈 오는 대로 무거운 택배를 나르지만 포기하지 않고 살아내려는 부모의 모습에서, 시비 거는 불특정 한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몸을 던져 자식을 보호하려는 부모의 모습을 곁에서 생생히 지켜보면서 우리 아들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때론 처절하고 비루해 보이는 현실이지만 평범한 가정의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선 경험할 수 없는 끈끈하고 진한 가족애를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험난한 택배를 하는 현실이 우리와 아들이 서로를 진솔하게 바라보는 계기가 된 걸까. 서로 더욱 강하게 의지하고 결속하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 강한 인연으로 연결된 택배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영화 코다에서 아버지 프랭크는 딸 루비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그저 주변의 청중들의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서 박수를 치며 좋아할 뿐이다. 딸의 목소리가 너무나 궁금한 아버지는 딸과 단둘이 있는 곳에서 노래를 불러달라고 한다. 노래를 부르는 딸의 목에 손가락을 대고 목울림을 통해 딸의 행복한 감정과 느낌을 뒤늦게 깊이 공감하게 된다. 노래를 귀가 아닌 손가락으로도 공감하는 방법도 있었다.
휠소터가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소음 속에서 까대기를 하다가 지치거나 힘들어질 때가 있다. 영화처럼 놀라운 기적이 아들에게 쉽게 일어나지 않는 현실이지만, 묻힌 아들의 음원을 찾아 들었다. 루비의 아빠, 프랭크가 그랬던 것처럼 아들의 노래에 곧 몰입하고 말았다. 어쿠스틱을 좋아하는 나는 아들의 감성적인 싱잉랩이 참 좋다. 아들의 가사 속에서 부모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느껴진다. 부모에 대한 소중한 감정과 그래서 부모님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앳되고 순수한 아들의 마음을 여태까지 왜 몰랐을까.
영화 코다를 보면서 눈물이 났다. 작품성 때문이 아니라 꿈을 이루려 가족을 떠나는 루비가 다시 뒤돌아가 가족을 부둥켜 앉는 장면을 보면서 가족의 의미가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루비의 꿈이 가족을 위한 꿈으로, 가족은 루비를 위한 가족으로 바뀌었다.
아들은 스스로가 인정받고 하고 싶어 하던 음악이기에 늘 곡작업에 열중하느라 택배일을 도울 때 말곤 방구석에 틀어 박혀있다. 수십 곡의 음악을 만들며 비상하는 꿈을 꾸면서 방 속에 스스로를 기꺼이 가둔다.
너는 뮤지션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하는 나를 가만히 꼭 껴앉으며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빠밖에 없다라며 고마워하는 아들. 글을 쓰게 되면서 음악을 하는 아들의 심정과 고충을 누구보다 잘 이해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를 위한 유일한 팬이자 응원하는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부모님 밖에 없다는 아들, 그래서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아들의 랩을 들으며 새로운 소망이 생겨났다.
먹고살기 위해 우리 가족은 택배를 선택했지만 글과 음악은 우리 가족이 살아가기 위한 일이었으면 한다. 돈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이유를 찾아내는 수단 말이다.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랑으로 우리 가족이 세상을 향해 가슴 뛰는 소통을 하는 작고 소박한 꿈을 꾸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