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만하게 40세에 시작한 사업이 3년 만에 허무하게 실패로 끝났다. 실패의 대가로 난생처음 겪어보는 '돈가뭄'과 혹독한 '돈갈증'을 생생하게 체험해야 했다.
당장 아이들의 교육비와 생활비, 그리고 다달이 내야 했던 월세 등에 대한 부담감이 공포스럽게 덮쳐왔다. 내 삶에서 돈의 보호막이 사라진 채 맞이하는 낮시간은 너무도 기나긴 고통이었고 밤은 내일 다시 올 아침에 대한 두려움으로 뒤척이며 고뇌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2010년 곤파스태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쾌청한 어느 날 아침에 홀로 산에 올랐다.
산속에 있는 나뭇잎들과 풀들이 한층 더 푸르고 싱그러웠다. 산정상을 향해 가던 중 쓰러진 많은 나무들을 보았다. 깊은 산속에도 이런 시련이 있구나. 세속의 인간들은 많은 죄 때문에 징벌차원에서 신에게 갖가지 시련을 받는다지만 산속 깊은 이곳에 사는 나무들은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어 이렇게 고통을 겪나 싶었다.
세상을 등지고 깊은 산중에서 욕심을 내려놓고 살면 한없이 평온하게 지내는 줄 알았는데 산속 나무들도 이런 깊은 시련을 여지없이 겪으면서 살아가는구나 싶어졌다.
쓰러진 나무들 곁을 지나치다 문득 그 모습들이 사람인(人)처럼 보였다. 마치 쓰러진 나무들이 인생은 시련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만 같아 걸음을 쉬 떼지 못한 채 한참을 지켜보았다.
산에서 내려온 나는 세상 속에서 실패한 중년에게 잔인하게 높기만 한 재기의 문턱을 넘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실업급여, 중년재취업 지원제도, 소상공인지원 등 정부가 제공하는 각종 창업과 취업지원 제도들은 저임금과 임시고용직 같은 저급한 일자리만 제공할 뿐 실질적 재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업 또는 창업을 통한 재기를 꿈꾸었지만 높디높은 현실의 벽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다시 현업으로 복귀를 시도할 수 밖에 없었다.
힘들게 다시 현업에 복귀했지만 다니던 회사의 경영난, 임금체불 등으로 불안정한 생활고를 견뎌야 했다. 50대에 들어서면서 직장 내 크고 작은 얄궂은 정치관계에 대한 염증과 노후에 대한 불안감은 점차 커졌다.
인생의 큰 전환이 필요하다는 위기감이 생겼다.
세렌디피티.
인생은 잘 짜놓은 각본이 아닌 우연한 흐름처럼 흘러갔다. 유튜브를 통해 '택배'를 접하게 되었다.
택배의 가장 큰 매력은 체력이 있는 한 은퇴 없이 계속해서 일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일한 만큼 벌 수 있다는 수입구조였다. 가족들과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사업으로 접근도 가능해 보였다.
운명의 대전환과도 같이 오랜 기간 해왔던 일과 살던 지역을 떠나 새로운 일, 새로운 터전으로 옮겨왔다. 모든 관계도 끊어냈다.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다.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되는 속에 택배 일을 가족과 함께 시작했다.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이젠 끝인가 보다 하고 절망감으로 좌절하던 순간에, 택배는 다시 시작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어줬다.
가족들과 생존하기 위해 안정적 수입이 필요했기 에 단 한 번도 육체노동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비 오면 비를 맞고 눈, 바람을 받아내며, 날 것 그대 로의 환경 속으로 뛰어들었다. 오직 돈을 벌기 위 해 그 외의 모든 것은 포기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택배를 시작했다.
택배를 선택하면서 나는 스스로가 많은 것을 포기하고 새롭게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인생의 갖은 시련과 고통을 겪어봤기에 사회적 약자계층으로 인식되는 택배일도 기꺼이 선택할 수 있었고 잘 적응해 내면서 한층 내적으로 성숙된 제2의 인생을 살아간다고 여겼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 택배를 하는 순간마다 나는 '아직도 철부지'라는 사실만 확인하게 되면서 당혹스러워졌다. 더구나 뜻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들 앞에서 요동치는 감정코끼리는 제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특히 분신과 같은 아들과 함께 일하면서 나의 모습을 제삼자의 시각으로 직접 보고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나와 꼭 닮은 감정선과 선택방식을 지닌 아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참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힘든 택배현실보다 이제껏 성숙한 어른으로서 롤모델을 아들에게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부모였다는 자책이 더 가슴을 아프게 했고 힘들었다. 오랜 시간 덜 다듬어진 내 곁에서 그런 나를 견뎌내며 참아왔을 아내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깊은 자성도 함께 하게 되었다.
<대상상실>이란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이것은 '현재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문제와도 맥을 같이한다.
반백년 넘게 살아보니 인생에서 성취보다는 포기해야 하는 게 더 많았다. 그럼에도 늘 포기하기를 주저하며 사니 인생철부지라는 딱지는 언제나 떨어낼지 스스로가 아득하게 여겨질 뿐이다.
돈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뛰어든 택배를 하면서 돈 뒤에 가려져 그동안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인생의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발견하게 되었다. 정작 내가 포기해야 할 것들은 따로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내, 아들들, 가족, 평범한 일상에 대한 소중함을 택배를 하면서 새롭게 깨닫고 인식하게 되었다.
행복할 수 있는 원천이 되는 것들은 철저히 외면한 채 허황되게 애쓰며 살아왔음을 아프게 자성해야 했다.
<철부지 사회>를 쓴 '가타다 다미미'는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것이란 살면서 다양한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유아적인 만능감과 자기애적인 이미지 등을 자연스레 포기할 줄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즉, 자기중심적인 세계와 현실 속 자신 간의 격차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성숙한 어른인 것이다. 정신과의사인 저자는 고뇌하고 갈등하며 사는 삶의 모습이 성장하는 현실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했다.
살면서 포기의 중요성을 깨닫고 포기하며 사는 법을 익히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조언한다.
이제 가족과 함께 힘겨운 택배를 하는 삶 속에서 그동안 움켜쥐었던 내속의 욕망과 기만들을 하나씩 포기하고 비워내면서 성숙한 어른으로 탈바꿈하는 과정들을 독자들에게 부끄럽지만 드러내고자 한다.
중년에 택배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며 좌충우돌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이겨내려 애쓴 내 삶의 흔적들을 조심스레 풀어내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볼품없는 삶이지만 함께 힘겨운 현실을 헤쳐나가는 이들에게 조그마한 위로의 단초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나와 함께 택배를 시작한 막내아들은 '힙합'래퍼이다.
제대한 후 그동안 만든 곡들을 정리해서 첫 음원을 발표했다. 가사 속에는 가족과 성공을 향한 아들의 속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가족을 위해서 필요한 건 그저 돈 뿐이라고 적나라하게 말한다.
스스로도 주변을 정리하고 가족들을 위해 돈을 벌기로 단단히 결심하고 택배와 음악작곡에 매진 중이다. 성공이라는 퍼즐을 맞추는 심정으로 택배 하며 한 곡 한 곡을 유산처럼 만들어가고 있지만 자신이 잘하고 있는 건지 가끔은 헷갈린다는 아들이다. 회의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찿아가려 애쓰는 대견한 아들이다.
때론 아들의 힙합처럼, 거침없고 자유롭게 어느 때는 가족과 함께 서서히 체득하고 영글어진 그런 사연들이 고스란히 담긴 택배인생에 대한 글들을 이제부터 편안하고 담담하게 써내려 가고자 한다.
핫네이버후드의 <CL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