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 대란기 2
오늘은 우리 결혼 22주년 기념일. 2시 20분에 걸려온 남편의 전화는 차가웠다.
"하루 더 자고 온다."
분명히 이혼이라고 마지막 경고까지 했건만, 이 남자는 정말 끝까지 간다.
독서실에서 돌아온 딸이 물었다. "엄마, 케이크 먹어도 돼? 아빠 언제 와?"
아빠한테 전화해 보라고 했더니, 잠시 후 케이크를 다시 냉장고에 넣으며 말했다. "아빠가 안 온다고 했어."
그 순간, 폭발했다.
이틀째 냉장고에서 썩어가는 케이크를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케이크가 무슨 죄냐고!
결혼기념일을 혼자 보내는 케이크가 얼마나 서러우겠어!
참다못해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야?" "평택 숙소."
평택 숙소라고? 집까지 늦어야 40분이면 오는 거리를 결혼기념일날 안 온다고?
성묘 핑계로 항상 1박을 하고 매번 놀다 오는 성묘길. 이번엔 단단히 주의를 줬건만, 여전히 똑같다.
"들어오지 마!"
폭풍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시댁에 있는 단톡방에 폭탄을 투하하기로.
먼저 지난번에 올렸던 "우리 결혼기념일 저녁에 외식이나 하자"라는 카톡을 다시 올렸다.
그다음엔 "결혼기념일 선물 잊지 마세요"라는 메시지 증거 자료 투척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이 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과감히 단톡방을 나와버렸다.
이혼 서류까지 올리려다가 귀찮아서 그만뒀지만, 이 정도면 충분한 경고 메시지 전달 완료!
생각해 보니 웃픈다.
22년을 함께 살았건만, 결혼기념일보다 성묘가 더 중요한 남편.
토요일 하루면 충분하지 일요일까지 외박이라고!!!!!!
아니, 정확히는 성묘 후 시댁식구들과의 자리가 더 중요한 남편.
집까지 고작 40분 거리인데, 하루 더 자고 온다는 이 여유로운 마음가짐이란!
케이크는 냉장고에서 홀로 22주년을 기념하고 있고, 나는 시댁 단톡방에서 당당히 나와 자유의 몸이 되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가슴이 답답한가?
시댁 단톡방에서 "명절 준비 어떻게 하지?" "누가 뭐 가져올까?" 하는 메시지들 때문에 스트레스받는가?
나처럼 과감히 나가버릴 용기는 없어도, 최소한 이런 생각은 해보자.
"내 결혼기념일도 안 챙기는 남편이 명절 때만 효자 노릇 하는 게 맞나?"
지금 이 순간, 나는 자유롭다.
시댁 단톡방의 알림음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며느리가 이래야지, 저래야지" 하는 소리 듣지 않아도 된다.
물론 남편이 돌아오면 또 다른 전쟁이 기다리겠지만, 최소한 오늘만큼은 당당하다.
결혼 22주년, 케이크와 나만의 기념일로 보내기로 했다.
케이크도 나처럼 시원하게 냉장고에서 나와서 식탁 위에서 당당히 자기 몫을 하고 있다.
때로는 이런 소소한 반란이 삶의 활력소가 되는 법이다.
P.S. 혹시 내일 남편이 꽃다발 들고 와서 "미안하다"라고 하면... 글쎄,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
하지만 시댁 단톡방에는 당분간 들어가지 않을 예정이다. 자유란 이런 것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