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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번째 이혼을 생각하며

도장 찍기


주말부부 10년 차, 결혼 22년 차의 솔직한 고백

어제 남편에게 분명히 말했다. "집에 들어오지 마!"

그런데 오늘 알바 중에 핸드폰으로 알림이 왔다.

남편의 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는 메시지. 아, 정말 완전 청개구리다.

무덤을 좋게 하기 위해 물 위에 무덤 해달라고 하면 양지바른 곳에 무덤 해줄까 봐

물가에 무덤 해달라고 했다는, 그 전설의 청개구리 엄마의 심정이 이런 거구나.


평택이라는 적당한 거리

우리는 2014년부터 주말부부다.

남편 회사에서 제공한 평택의 숙소 때문에 시작된 생활이 벌써 10년이 넘었다.

누가 보면 꽤 멀리 살아서 주말부부 하는 줄 아는데, 사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올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 '적당한 거리'가 필요했다.

주말부부 생활의 가장 큰 장점? 저녁밥 안 차려서 제일 좋다. 이걸로 끝이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400번의 도장, 400번의 이혼

아침 7시에 나가서 밤 7시에 집에 들어왔다. 피곤해서 싸움힘도 없고, 싸울 가치도 없다고 느껴졌다.

집에 오는 길에 자전거에서 이상한 쇳소리가 났고, 새로 산 구두 앞창이 벌어져 있었다.

거실에 구두와 본드를 올려놓고 빨간 펜으로 "수리"라고 써놨다.

서로 말도 안 하면서 나는 오늘 일한 것에 대한 보고서만 묵묵히 작성했다.

8시가 넘어서야 보고서가 끝났다.

찬밥에 김치찌개를 넣고 프라이팬에 가열한 후, 혼자 묵묵히 밥을 먹었다.

맥주 한 캔과 함께, 조용히.

그때 들렸다. "밥 없어?"

이틀을 외박하고 온 남편의 첫마디였다.

스스로 쌀을 씻고 밥을 하는 남편을 보며 생각했다.

'계속 말을 안 해야겠다. 혼자 밥을 하다니, 반찬 투정도 없을 테고 차라리 잘 되었다.'


그리고 나는 통장 사실조사 장부를 꺼내어 통장란에 도장을 콱콱 찍었다

400번 넘게. 이혼서류에 도장 찍듯이 감정을 실어서.


22년 동안 400번 넘게 이혼을 생각했나? 도장 찍는 소리가 마치 내 마음속 답답함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청개구리의 은밀한 배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웃겼다. 화가 나서 말도 안 하는데,

"수리"라고 써놨다고 정말로 내 구두를 고쳐줄 것 같은 남편.

자전거 소리가 이상하다는 내 말도 들었을 것 같은 남편.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들어온 청개구리지만, 그래도 내가 힘들어하는 걸 알고는 있는 모양이다.

말은 안 해도.


주말부부라는 발명품

매일 얼굴 보고 살면 이렇게까지

오래 못 왔을 것 같다.

화가 나도 며칠 뒤 만나면 "아, 내가 뭘 가지고 화냈더라?" 하게 되고, 서로 눈치 보지 않고 각자만의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

남편은 혼자 밥 해 먹으며 "내가 이렇게 살림 잘하는 남자였나?" 자화자찬하고 있을 것이고, 나는 조용히 맥주 한 캔으로 하루의 피로를 날렸다.

이것도 나쁘지 않다.

22년을 버텨온 비결이 바로 이 '적당한 거리감'인지도 모르겠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마음만 먹으면 올 수 있지만 굳이 매일 오지는 않는 그런 거리.


401번째는 없을 것 같다

오늘도 400번째 이혼을 생각했지만, 401번째는 없을 것 같다. 내일이면 또 괜찮아질 테니까.

화장실에 가보니 그 더럽던 거울과 세면대와 샤워벽 유리가 깨끗해 졌다

청소를 해놔서 일까


평택이라는 적당한 거리가 있으니까.


20년 넘게 살면서 터득한 우리만의 소통법이랄까.

"수리"라고 빨간 글씨로 써놓기.

깜작 청소해 놓기

말은 안 하지만 챙겨주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

이런 어색한 배려가 사실 직접적인 사과보다 더 따뜻할 때가 있다.


평택에서 집까지, 마음의 거리로는 딱 적당한 그 공간에서 우리는 오늘도 각자의 방식으로 살고 있다.

나는 브런치에 남편욕을 하며

남의 편은 거실에서 TV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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