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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끼의 무게

안전보행지도사 : 학교안전지킴이


육교 그늘 아래, 주황색 조끼를 입은 어르신들이 보였다. '학교안전지킴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나는 그때 횡단보도 앞에서 초록색 조끼에 깃발을 들고 있었다.

빨간불, 초록불, 다시 빨간불.

내 발은 신호등처럼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 일이 더 편해 보이는데?"

퇴근길, 나는 생각했다. 육교 밑에서 어슬렁거리는 것과 신호등 앞에서 꼼짝없이 서 있는 것.

같은 시급이라면 당연히 전자가 낫지 않을까.

그날 밤, 나는 '학교안전지킴이' 공고문을 검색했다.

"아, 이런 직업도 있었구나."

세상에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안전보행지도사 말고도, 학교안전지킴이 말고도, 이름도 생소한 직업들이 넘쳐났다.

그리고 그 모든 일에는 조끼가 따라왔다.

어느 날, 평생학습관 앞을 지나가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지인이었다. 그분도 주황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학교안전지킴이.

우리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분은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마스크를 고쳐 쓰는 척, 가방을 뒤지는 척, 시선을 피했다.

나는 모르는 척 지나갔다. 무안하실까 봐.

그런데 이상했다. 왜 서로를 피해야 했을까?

처음 교문 앞에 섰을 때, 나도 부끄러웠다.

하는 일은 엄마들이 하는 자원봉사와 똑같아 보이지만

그들은 무급으로, 나는 시급을 받으며 똑같은 자리에 섰다.


실버 어르신 단체들이 줄줄이 배출되면서 상황은 더 묘해졌다. 백발의 할머니, 허리 굽은 할아버지와 나란히 깃발을 들고 섰다.

"이건 내가 더 늙어서 해야 할 일인데..."

그렇게 나는 1년을 마쳤다.


그런데 말이다.

육교 밑 어르신들은 정말 쉬고만 계셨을까? 어쩌면 그분들은 '보이지 않는 곳'을 지키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나는 신호등 앞에서, 그분들은 후미진 골목에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아이들을 지켰다.

평생학습관에서 얼굴을 가리던 지인도, 교문 앞에서 어색해하던 나도, 결국 같은 마음이었다.

'이 일을 하는 내가 부끄럽다'가 아니라,
'이 일을 하는 나를 누가 볼까 봐 부끄럽다'는 것.

문제는 일이 아니라 시선이었다.

요즘 나는 생각한다. 조끼에는 무게가 있다고.

누군가는 그 무게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누군가는 그 무게에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조끼는 조끼일 뿐이다.

그 안에 든 사람이 중요하지, 조끼의 색깔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조끼 앞에만 서면 그 말을 잊을까?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나은 조끼가 아니라, 조끼를 바라보는 더 나은 시선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조끼를 입는다.
횡단보도 앞에서, 육교 밑에서, 교문 앞에서.

그들이 지키는 건 아이들의 안전만이 아니다.
서로를 향한 존중, 일에 대한 존엄,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

조끼는 가볍다.
하지만 그 안의 사람은 무겁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조금 더 당당히 조끼를 입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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