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봉 미녀들의 수다
필봉산의 의자
매일 아침 9시 30분, 동네 주부들이 하나둘씩 필봉산 입구에 모인다. 많을 땐 열 명, 적을 땐 혼자라도 누군가는 꼭 산을 오른다. 등산이 끝나면 각자의 삶으로 흩어지지만, 오르는 동안만큼은 우리 모두 한 팀이다.
아이들 이야기, 학원 이야기, 동네 친구 이야기... 숨이 차오를 틈도 없이 대화가 이어진다. 나는 시간이 날 때 가끔 참여하는 편이지만, 이 모임은 늘 그 자리에 있다. 커피숍이 아니라 산길에서 만나 건강을 챙기며 수다를 떠는, 보기 드문 건전한 모임이다.
모두 각자의 사정과 목적이 있다. 아이 학원비를 보태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이, 자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이, 오직 건강을 위해 걷는 이. 나는 살을 빼려 시작했다. 그렇게 각자의 이유로 시작한 산행은 어느새 우리의 끈끈한 유대가 되었다.
오늘은 한 엄마가 조용히 털어놓았다. 모범생인 딸이 국제고에 떨어졌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성적도 기대에 미치지 못해 학원을 그만두고 싶어 한다는 고민. 공부 잘하는 아이를 둔 부모가 오히려 더 큰 걱정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산 중턱쯤 오르면 나무에 단단히 묶인 의자가 있다. 숨이 찰 때면 거기에 앉아 잠시 쉰다. 누가 갖다 놓았는지 모른 채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그 의자. 어느 날, 광고 전단 봉투를 나눠주는 80대 할아버지를 만났다. 손수 붓글씨로 좋은 글귀를 적어 봉투에 넣고 다니며, 마음에 드는 이에게 건넨다. 그 봉투를 받은 적이 있는 우리는 언젠가 알게 되었다. 그 의자의 주인이 바로 그 할아버지라는 걸.
그분도 젊었을 땐 이 산을 거뜬히 올랐을 것이다. 지금은 자리를 내어주며, 또 다른 이들이 이 산을 오를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언젠가 나도 그 의자가 필요한 날이 오겠지. 그땐 누군가를 위해 또 다른 의자를 묶어둘 수 있을까.
오늘도 필봉산은 우리를 품는다. 땀으로, 숨으로, 이야기로 이어지는 삶.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쉼터가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