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카 옆 어두운 창문—우리가 놓친 것들

도서관에 아들을 내려주며


대치동 학원가의 캠핑카 사진을 보면서, 나는 한 부모의 얼굴을 제대로 봤다.

윤기 없는 얼굴. 그것이 내 얼굴과 겹쳐졌다.


자전거 타던 날들

나는 겨울밤 영하의 날씨에도 자전거를 탔다.

손가락이 곱아질 정도로 차가운 핸들을 쥐고, 도서관 불이 켜진 자리까지 페달을 밟았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엄마도 그렇게 살았으니까.

우리는 그걸 "성실함"이라고 부르며, "이 정도는 견뎌내야지"라고 중얼거렸다.

부모 세대는 그 고통을 미덕으로 포장했다.

힘들수록 좋은 아이, 참을수록 훌륭한 자식. 그런 이야기들.


차 키를 건네는 순간

그런데 이제 막내가 손을 내민다. 추운 밤 자전거 대신 차를 타고 싶다고.

그 손길을 바라보며 나는 깨닫는다.

내 어린 시절의 자전거는 나를 단련한 게 아니라 마모했고, 나를 만든 게 아니라 소모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차 키를 건넨다.

미안함과 동시에 조금의 죄책감과 함께. 마치 내가 견뎌낸 그 고통을 물려주지 않는 것이 죄인 것처럼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내 자식만큼은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밤 열 시, 불 꺼진 방

사춘기를 지난 건지, 예비 고등학생인 아이는 밤새 게임을 한다.

모니터의 푸른빛이 얼굴을 비추고, 마우스 클릭음이 자정을 넘어서도 계속된다.

나는 방문을 조용히 닫는다. 들어가지 않는다.


학원 다니는 아이는 새벽에 나간다.

대치동의 강사들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가격대에 서 있고, 책상 위에는 참고서가 탑처럼 쌓여 있다.

그 아래서 아이는 자란다. 또는 망가진다. 우리는 구분하지 못한다.


점심 때서야 일어나는 아이

새벽에 게임을 하던 아이는 점심 때서야 깨어난다.

나는 기다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아이가 자전거를 탈 때쯤은 어떤 세상일까.

날씨가 추워질 때 "그래도 참아야지"라고 말할까, 아니면 "힘들면 말해"라고 들을까.'

우리 세대는 그렇게 배우지 못했다.

참는 게 선이고, 말하는 게 약함이었으니까.


캠핑카 앞의 부모

대치동의 캠핑카 안에는 침대가 있다.

엄마의 차에는 자식의 휴식이 있다.

월세 110만 원, 190만 원, 260만 원. 그 숫자들이 부모를 좌절하게 만든다.

그래서 캠핑카를 센다.

주정차 과태료를 계산한다.

어느 것이 더 싼 지, 어느 것이 더 현실적인지.

이게 우리가 원던 현대사회인가.


눈에 안 보이는 곳

나는 막내를 차에 태워 바래다준다.

아이가 도서관에 들어가면, 나는 차에 남는다.

핸들을 쥔 채로 창밖을 본다.

차 안의 따뜻함은 나를 안심시킨다.

내 자식이 게임방이나 PC방에 있지 않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게 내 마음의 평화다.


슬프지 않은가. 우리의 평화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자식이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있는 것.

그것이 내 안정감의 원천이 되어 버렸다.

마치 무언가를 놓아주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통제의 다른 형태가 아닐까.


자전거에서 차로, 차에서 뭐로

나는 자전거를 탔다. 엄마는 걸었다. 할머니는 어땠을까.

그리고 내 아이는? 언제쯤 자신의 발로 서게 될까. 차 없이.

대치동의 캠핑카는 우리가 만든 현실이다.

아이들의 학원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 아이들의 휴식을 보장하기 위해, 아니면 아이들의 현재 위치를 항상 알기 위해.

우리는 자식을 위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자식을 속박한다. 참을 수 없는 무게로.

그 무게 속에서 엄마와 아빠는 캠핑카에 앉아 있고, 아이는 학원 교실에 앉아 있고, 모두가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게 우리가 견뎌내고, 또 견뎌내게 할 삶인가.


마지막에

나는 오늘도 차 키를 건넬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차에 남아 아이가 들어가는 모습을 볼 것이다.

그것이 내 마음의 평화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하지만 깊은 밤, 아이가 점심 때서야 일어나는 것을 보며, 자전거를 탔던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나는 묻는다.

'우리가 잘못된 건 뭐고, 뭐가 맞는 건가?'

대치동의 캠핑카들은 그 답을 모른다. 단지 거기 있을 뿐이다.

마치 우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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