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아버지
오월이다.
유치원 담장 너머로 아이들 웃음소리가 쏟아진다.
나는 벤치에 앉아 그 소리를 듣는다. 일흔셋. 무릎이 시린 몸으로.
딸아이가 손녀를 데리러 오는 시간은 늘 5시 반이었다.
오늘은 어린이날이라 조금 일찍 온다고 했다.
나는 일찍 나와 기다렸다. 왜 나왔는지, 스스로도 잘 모른 채.
유치원 대문이 열리자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엄마, 아빠 품으로.
한 남자아이가 달려 나와 아빠 목에 매달렸다.
아빠는 그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하늘 위로 한 번 던졌다가 받았다.
아이가 까르르 웃었다.
나는 그 소리에 눈을 감았다.
나는 그런 적이 없었다.
아빠에게 달려간 적이. 아빠 목에 매달린 적이. 하늘로 던져진 적이.
아버지는 내가 세 살 때 떠나셨다. 독일로.
세 살짜리가 기억할 수 있는 아버지의 온도는 없었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보내주신 돈으로 이 집 샀다."
가을이면 감이 열리던 마당 있는 집. 내가 좋아했던 그 집.
나는 그 집이 좋았다. 하지만 그 집보다 아버지와의 기억 하나가 더 좋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식지에서 읽었다.
광부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000미터 이상을 내려간 다음 다시 전철을 타고 3~4킬로미터를 더 이동해야 막장에 닿았다. 독일 탄광은 100미터 내려갈 때마다 온도가 1도씩 올라갔고 지열은 섭씨 36도에 육박했다.
36도.
내가 어린이날 아이스크림을 핥던 그 오월의 온도. 아버지는 그 온도의 땅 아래서 일하셨다.
가만있어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작업복을 입을 수 없어 속옷만 입고서 일하기도 했고, 장화에 땀이 차면 뒤집어 붓고 다시 신었다.
장화를 뒤집어 땀을 붓는 손.
나는 그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 기억이 없다.
광부들은 40~60킬로그램에 달하는 쇠기둥 슈템펠을 개인당 하루에 60~80개씩 세워야 했다. 기계의 속도에 맞춰가며 일하다 보면 우리의 처지를 한탄할 시간은 자연스레 뒤로 미뤄졌다.
처지를 한탄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면 가족 생각은 언제 하셨을까. 밥 먹는 시간? 잠드는 시간?
그 시간에 나는 아버지 없이 어린이날을 보냈겠지.
딸이 유치원 대문 앞에 섰다.
손녀가 달려 나왔다.
"엄마!"
딸이 쭈그려 앉아 두 팔을 벌렸다. 손녀가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딸이 손녀를 꼭 안았다. 오래. 오래.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저 안음이 부러웠다. 딸에게도. 손녀에게도.
가장 사랑받아야 할 나이에 나는 아버지 품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 품이 되어줄 나이에 나는 무릎이 시려서 뛸 수가 없다.
1965년부터 1975년까지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고국에 보낸 송금액은 총 1억 153만 달러.
그 돈 안에 아버지의 어린이날이 있었다. 아버지가 포기한 오월이 있었다.
아버지는 내 어린이날 대신 나라의 경부고속도로를 놓으셨다. 내 아이스크림 대신 포항제철의 쇳물을 녹이셨다.
나는 그것을 탓하는 게 아니다.
다만.
딸이 손녀 손을 잡고 걸어오다 나를 발견했다.
"아버지, 여기 계셨어요?"
나는 일어섰다. 천천히.
손녀가 내게로 달려왔다.
"할아버지!"
나는 쭈그려 앉고 싶었다.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싶었다.
무릎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허리를 굽혔다. 최대한. 손녀의 눈높이까지.
손녀가 내 목을 꼭 안았다.
그 온기에 눈이 뜨거워졌다.
나는 60년 전 독일 땅 밑 천 미터에서 오월을 보낸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버지도 이런 온기를 원하셨겠지.
아버지도 이런 목에 매달리고 싶으셨겠지.
집을 살 수 있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집보다 더 따뜻한 것은 아버지의 장화 냄새였을 것이다.
땀으로 젖어 무거웠을 그 작업복 냄새였을 것이다.
우리는 집을 얻었고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이제야 그 두 가지가 사실은 하나였다는 걸 안다.
손녀가 물었다.
"할아버지, 우리 아이스크림 먹을까요?"
나는 웃었다.
"그래."
오월의 햇살 아래 나는 손녀 손을 잡고 걷는다.
이것이 아버지가 지하 천 미터에서 세워 올린 세상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