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크 바닥이 보이던 날

노트 배부 마지막날



마지막 날이었다.

차 트렁크를 열었을 때, 드디어 바닥이 보였다.

그 흔한 노트 몇 권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걸 보는데, 왜인지 모르게 코끝이 찡했다.

몇 주 전, 트렁크에 노트를 가득 실을 때만 해도 이게 언제 다 없어지나 싶었는데.

아침 일찍 수레를 끌고 아들이 졸업한 중학교 교문 앞에 도착했다.

낯선 듯 익숙한 그 교문. 아들 입학식 때, 졸업식 때, 몇 번이나 서 있던 자리인데 오늘은 내가 노트를 나눠주는 아줌마로 서 있다.

경비 아저씨가 손을 흔들며 말씀하셨다.

"저기 위쪽 횡단보도 앞으로 가보세요.

거기 서면 중학교, 고등학교 애들 다 지나가거든요."

오, 묘수다. 수레를 끌고 교차로로 자리를 옮겼다. 1석 2조라니. 나름 전략적이다, 싶었다.

8시가 됐다. 중학생이 없다.

8시 10분. 여전히 없다.

그 사이 고등학생들에게 노트를 나눠주며 몸을 풀었다.

그리고 8시 30분.

우르르.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노트를 나눠주는 건, 생각보다 훨씬 심리전이다.

한 명씩 뜨문뜨문 걸어올 때는 그나마 낫다. 눈이 마주치면 살짝 내밀어 본다. 반은 받아준다. 받을 때의 그 작은 온기가 손끝에 남는다.

문제는 무리가 몰려올 때다.

열 명이 한꺼번에 지나가면, 노트를 든 내 손이 공중에서 그냥 허공을 가른다.

아이들은 무리 속에 숨어버린다. 무리 안에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아무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열 명 지나가야 한 명 받을까 말까.

오늘은 마지막 날이라 노트를 남기면 안 된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더 열심히 내밀어 본다.

더 환하게 웃어본다.

눈을 더 크게 뜨고 아이들을 바라본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생겼다.


어느 순간부터, 노트를 거절당하는 게 하나도 안 아팠다.

첫날엔 외면당할 때마다 살짝 쪼그라들었는데. 이제는 그냥 담담하다.

모르는 어른이 내미는 걸 덥석 받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안다.

요즘 세상에 공짜라는 말이 오히려 수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것도.

거절도 나름의 방식이 있더라.

어떤 아이는 눈도 안 마주치고 그냥 지나친다.

어떤 아이는 고개를 살짝 젓는다.

어떤 아이는 "괜찮아요" 하고 작게 말하며 미소를 보낸다.

그 마지막 유형의 아이들이 어찌나 이쁜지.

거절도 이렇게 예쁘게 할 수 있구나.

그리고 가끔씩, 두 손으로 공손히 노트를 받아가는 아이가 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 사람 모두에게 사랑받은 것 같다.

과장이 아니다.

진짜다.

고작 노트 한 권인데. 1,000원도 안 하는 노트 한 권인데, 두 손으로 받아주는 그 동작 하나가 하루를 통째로 환하게 만들어 버린다.

노트 바닥이 다 보일 즈음,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건 공짜를 나눠주는 건데도 이렇게 힘든데.

물건을 파는 영업 사원들은 어떨까.

팔리지 않으면 생계가 흔들리는 사람들은. 거절이 두려워서도 나가야 하는 사람들은.

나는 그냥 알바였다. 다 나눠줘도 그만, 못 나눠줘도 그만. 그런데도 한 명이라도 더 받아주길 바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영업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사람의 거절을 버텨내며 다시 웃을 수 있다는 것.

그게 얼마나 단단한 마음인지, 노트를 나눠주며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수레를 접으며 마지막으로 교차로를 돌아봤다.

아이들은 이미 교문 안으로 다 사라지고 없었다.

오늘 내가 건넨 노트를 받아 간 아이들이 그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가기를.

수업 필기든, 낙서든, 짝사랑하는 애 이름이든.

뭐든 좋으니까.

바닥이 보이던 날, 나는 거절에 익숙해지는 법과 작은 친절이 얼마나 큰 온기인지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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