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적 현실 - 썩은 뿌리가 만드는 썩은 사회
고3 딸을 둔 학부모로서 밤잠을 설치며 이 글을 쓴다.
안동의 시험지 절도 사건과 몇 년 전 숙명여고 사건을 보며 드는 생각은 하나다.
이것이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이다.
"보이는 바퀴벌레가 한 마리면 숨어있는 바퀴벌레가 백 마리"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극히 일부가 운 나쁘게 걸려서 드러난 사건들일 뿐이다.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부정행위가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내가 사는 이 지역, 내 딸이 다니는 학교에서도 과연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을까?
아니면 나만 모르는 채로 누군가는 이미 답을 알고 시험을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내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동시에 이런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절망스럽다.
더 끔찍한 것은 이렇게 부정행위로 키운 자식들이 결국 명문대에 진학하고, 나중에 이 나라의 지도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시험지를 미리 받아보고 전교 1등을 했던 그 학생이 서울대에 진학해서 고시를 통과해 공무원이 되거나 대기업에 입사한다면? 재벌 2세가 되어 경영권을 물려받는다면? 정치인이 되어 우리나라를 이끌어간다면?
그들의 DNA에는 이미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가치관이 새겨져 있다.
어려서부터 부정행위를 통해 성공의 맛을 본 그들이 과연 나중에 떳떳하고 정직한 리더가 될 수 있을까?
결국 썩은 뿌리에서 자란 나무는 썩은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다시 썩은 씨앗을 퍼뜨리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점점 더 불공정해지고 신뢰가 무너지는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문제는 이런 부정행위를 근절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시험지 관리야 그렇다 치자. CCTV를 달고 보안을 강화하고 접근 권한을 제한하면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머릿속에 있는 시험 정보는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출제 교사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이나 자녀에게 "이번 시험은 3단원에서 많이 나올 거야", "서술형 문제는 이런 유형으로 준비해"라고 귀띔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더 교묘한 방법들도 얼마든지 있다. 수업 시간에 "이 부분은 중요하니까 잘 봐두세요"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상 시험 정보 유출 아닌가? 시험 직전 보충수업에서 "이런 문제 유형을 연습해보자"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결국 내신 시험의 공정성이라는 것 자체가 허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은 처음부터 불공정한 게임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더 한심한 것은 시험 문제의 퀄리티다. 출제하는 교사의 역량에 따라 문제의 난이도와 수준이 천차만별이다. 어떤 과목은 교과서만 봐도 풀 수 있는 쉬운 문제가 나오고, 어떤 과목은 대학 수준의 어려운 문제가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내신 등급이 공정하게 매겨진다고 할 수 있을까? 쉬운 문제를 내는 교사의 과목에서는 만점 받는 학생이 수두룩하고, 어려운 문제를 내는 교사의 과목에서는 평균이 50점도 안 나온다.
게다가 출제 교사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유리하게 문제를 낼 수도 있다. 자신의 수업 방식과 강조점에 맞춰 문제를 출제하면 다른 교사에게 배우는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불리해진다.
내 아이와 같은 나이의 학생들이 어른들의 탐욕 때문에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 학부모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명문대 입학이라는 허상을 위해 자녀의 인격과 품성을 송두리째 망쳐버린 것이다. 전교 1등이라는 가짜 성과를 위해 아이를 범죄자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정직하게 공부한 2등 학생은 억울하게 1등 자리를 빼앗겼는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우리 사회의 교육 시스템은 이미 돈 앞에서 무너져버렸다. 수백만 원을 주고 시험지를 빼돌리는 것이 가능한 현실, 교사마저도 돈 앞에서 교직의 양심을 저버리는 현실이 우리 교육의 민낯이다.
사교육비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학원가에서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식의 마케팅이 성행한다. 정작 교육의 본질인 인성과 창의성은 뒷전이고, 오로지 점수와 등급만이 아이의 가치를 매기는 잣대가 되어버렸다.
나 역시 고3 학부모로서 솔직히 고백하건대, 때로는 불안과 조급함에 휩싸인다. 다른 아이들이 받는 사교육을 우리 아이만 못 받으면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내신 한 점 한 점이 아이의 미래를 좌우한다는 압박감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법과 부정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 학부모들이 이런 왜곡된 교육 현실을 방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해야 한다. 아이에게 "1등만 하면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성공해라"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전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밤마다 잠 못 이루며 이런 생각들을 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 딸의 미래가 걸린 문제니까.
정직하게 공부하는 우리 아이가 바보가 되는 건 아닐까?
다른 아이들은 모두 편법과 꼼수를 쓰는데, 우리만 원칙을 지키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의심이 들 때마다 자괴감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나도 불법적인 방법을 쓸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버티고 있으면 내 아이만 손해를 보는 것 같아서 답답하다.
결국 문제는 시스템 전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신 제도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쳤다.
학생들은 "어차피 다른 애들도 다 부정행위하는데 나만 손해 보면 안 되지"라고 생각한다.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다른 학교는 다 문제를 쉽게 내서 학생들 성적을 올려주는데, 우리만 어렵게 내면 우리 학생들만 손해"라고 생각한다.
학부모들은 "다른 집은 다 과외 정보를 얻어서 아이를 도와주는데, 우리만 모르는 척하면 우리 아이만 뒤처진다"고 생각한다.
결국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도 부정행위를 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뢰 사회의 붕괴다.
가장 괴로운 것은 내 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정직하게 공부해라"라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다른 애들이 다 부정행위하는데 너만 정직하면 손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공정한 경쟁을 해라"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전혀 공정하지 않은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국 나는 내 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공정하다고, 노력하면 보상받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교육의 진정한 목적은 아이들이 올바른 인격을 갖춘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지식을 습득하고 사고력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직하고 성실한 품성을 기르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정직하게 실패하는 것이 부정하게 성공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시험 점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으로서의 기본 도리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개인의 각성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근본적으로 대학 입시 제도부터 바뀌어야 한다.
오로지 내신 성적과 수능 점수만으로 아이들을 줄 세우는 시스템, 명문대 입학이 인생의 성공을 보장한다는 허상을 깨뜨려야 한다.
교육당국은 진정한 교육 개혁을 위해 나서야 한다. 점수 경쟁이 아닌 창의성과 인성을 중시하는 교육, 다양한 재능과 적성을 존중하는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썩은 교육 시스템에서 자란 아이들이 미래의 우리나라를 이끌어간다고 생각하면 암담하다.
정직과 공정함보다는 편법과 꼼수가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학습한 세대가 사회의 주역이 될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갈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지금보다 더 불공정하고, 더 부패하고, 더 신뢰할 수 없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이런 썩은 교육 현실을 물려준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공정하고 건강한 경쟁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돈과 권력이 아닌 실력과 노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겠다. 우리 아이들이 정직하고 떳떳하게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작은 일부터 실천해 나가겠다. 내 아이에게만큼은 "정직이 최고의 경쟁력"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가르치겠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에서도 부정행위가 있었다던데, 역사는 정말 무한 반복인가?
우리 모두가 변해야 아이들의 미래가 바뀐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소중함을 아이들에게 전해주자.
독서실에 있는 딸에게
성적이 나오지 않아 스트레스받고 있는 고3 딸아, 널 응원한다. 정직하게 공부하는 네가 진짜 승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