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왕의 고백
오전 10시: 공공화단 잡초 제거 봉사
오후 2시: 복지관 워크숍 참석
저녁: 통장회의 참석
밤 7시: 문학관 수업
봐라, 이 완벽한 시민 의식을! 이 숭고한 봉사 정신을! 마치 현대판 테레사 수녀가 따로 없다.
집에 돌아와 밥통을 열어보니 코드가 빠져 있고, 밥에는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엄마 밥 언제 한 거야?"
"밥통에 시간 나오잖아."
"코드가 빠져 있어 숫자가 안 보여."
이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까 복지관에서 나는 이렇게 당당히 발표했다:
"많은 단체에서 음식 배달 봉사를 하지만, 그분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반찬이 아닌 말동무입니다.
봉사 조끼 입고 사 온 음식을 플라스틱 접시에 랩도 벗기지 않고 올리고, 기념사진만 찍고 가는 그런 봉사가 아닌, 진짜 소통할 수 있는 봉사가 필요합니다!"
청중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나는 뿌듯했다. '역시 내가 봉사계의 철학자구나' 싶었다.
시아버님 농사짓는 곳에서는 풀 한 포기 뽑지 않는 며느리가, 공공화단에서는 열심히 잡초를 뽑고 있었다.
가족의 밥상은 곰팡이가 피게 놔두면서, 남의 집 어르신들에게는 "진정한 소통"을 외치고 있었다.
이게 바로 현대인의 이중성이다.
만약 오늘을 SNS에 올린다면:
"오늘도 의미 있는 하루! #봉사활동 #지역사회 #문학공부 #소통의 중요성"
하지만 현실은:
"집에서는 밥통 코드도 제대로 못 챙기는 사람..."
우리는 왜 이렇게 살까? 왜 집 밖에서는 성인군자가 되고, 집에서는 무심한 가족이 될까?
아마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일 거다. 봉사활동에서는 박수받고, 인정받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집에서는? 그냥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의 연속이다. 누가 손뼉 쳐주지도 않고, 인스타에 올려봤자 '좋아요'도 별로 안 늘어난다.
결국 나는 브런치 작가다.
남들 이야기는 잘 쓰면서 정작 내 이야기는 제대로 못 쓰고 있었다.
아니, 내 삶 자체를 제대로 못 쓰고 있었다.
복지관에서 "진정한 소통"을 외치던 그 입으로, 집에서는 가족과 제대로 대화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봉사활동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다.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도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순서가 있는 게 아닐까?
우선 내 가족부터 잘 챙기자
밥통 코드부터 제대로 꽂자
그다음에 남을 도우러 가자
우리 모두 한 번쯤 거울을 봐야 할 때가 있다.
집 밖에서의 나와 집 안에서의 나가 너무 다르다면, 그건 진정성의 문제다.
봉사는 좋다.
하지만 그 봉사가 내 가족에 대한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 밤, 곰팡이 핀 밥을 보며 깨달았다.
진정한 봉사는 집에서 시작된다.
P.S. 아마도. 집밥을 먹으며 몇시간이며 가족간에 대화를 한다는 항상 정성과 사랑이 담긴 맛있는 도시락을 싸는 분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미안해 우리 가족
이제 50넘으니 밥 하기 싫어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