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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호실의 빈 공간이 남긴 이야기

떠난 자리로 그 사람이 느껴지는


오늘도 고시원 청소 알바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 마음 한구석이 무겁다.

511호실 문을 열었을 때의 그 순간이 자꾸만 떠오른다.

"511호 학생 오늘 퇴실했어요. 교통사고 나서 지금 혼수상태라서 이모가 와서 짐 뺐어요."

원장님의 메시지를 받고 그 방으로 향했을 때, 나는 또 다른 평범한 퇴실 청소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고시원에서 일한 지 벌써 2년. 수많은 퇴실을 봐왔다. 계약이 끝나서, 방세가 밀려서, 더 나은 곳으로 이사해서, 지방으로 돌아가서... 각자의 이유로 떠나간 사람들의 흔적을 치우는 것이 내 일이었다.


하지만 511호실은 달랐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것은 정돈된 공간이었다.

급하게 짐을 싸서 나간 흔적이 있을 법도 한데, 방은 놀라울 정도로 깨끗했다. 책상 위엔 먼지 한 톨 없이 정리되어 있었고, 침대 시트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변기 물통 안의 동그란 세정제였다. 파란색 세정제가 물속에서 천천히 녹아내리며 만드는 작은 소용돌이. 그리고 책상 모서리에 놓인 페브리즈 한 병.

'이 사람은...'

갑자기 목이 메었다. 나는 그 학생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아마도 밤늦게 공부하고 늦잠 자는 그 학생의 생활 패턴이 엇갈렸을 테니까. 하지만 이 작은 공간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너무나 선명했다.

변기 세정제를 넣어둔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자신만을 위한 배려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다음에 이 방을 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페브리즈 역시 마찬가지다. 좁은 고시원 방에서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는 세심함.

책상 서랍을 열어보니 연필 한 자루, 지우개 하나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쓰레기통엔 분리수거까지 제대로 되어 있었고, 심지어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하나 없이 깔끔했다.

'이런 사람이 지금 병원에서...'

원장님이 말했다. 어머니가 울면서 전화하셨다고. 그 목소리에 담긴 절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을 것이다. 혼수상태라는 말이 얼마나 무거운지, 가족들이 얼마나 애타는 마음일지.

나는 고시원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을 봐왔다.

어떤 방은 음식 냄새와 곰팡이로 가득했고, 어떤 방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생활했던 흔적이 역력했다.

그런 방들을 치우며 때론 짜증이 났고, 때론 안타까웠다.

각자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최소한의 배려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511호실의 그 학생은 달랐다. 아마 매일 밤늦게까지 책과 씨름하며 꿈을 향해 달려가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작은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청소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방을 둘러보며, 나는 그 학생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당신의 작은 배려들이 모두 느껴져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아요.


부디, 꼭 깨어나세요.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당신처럼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는 더 필요해요."


문을 닫으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사람은 떠난 후에도 흔적을 남긴다. 511호실에 남겨진 것은 단순한 물건들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품이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 작은 것 하나라도 정성스럽게 대하는 태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따뜻함.

집에 돌아와 이 글을 쓰며, 나는 511호실 그 학생의 회복을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나도 어딘가에 흔적을 남길 때, 그 학생처럼 따뜻한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511호실은 이제 비어있다. 하지만 그곳에 살았던 사람의 마음은 여전히 그 공간에,

그리고 그 공간을 청소한 나의 마음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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