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여전히 꿈꾸는 해외봉사)
"라틴아메리카 문화여행과 해외봉사 도전"이라는 강의 제목만 봐도 가슴이 뛰었다. 멜라판타지, 에비타, 프리다 칼로... 안데스의 '엘 콘도르 파사'가 귓가에 맴돌고, 마추픽추와 우유니 소금사막의 환상적인 풍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인생은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는 강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운 출발을 꿈꿨다. Tranquilo(진정해)와 Mañana(내일) 대륙의 여유로운 삶. 한여름 크리스마스와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라틴 문화. 아, 얼마나 매력적인가.
하지만 강의실을 나서는 순간, 현실이 머리를 후려쳤다.
동유럽에서 4년을 살아본 나로서는 로맨틱한 강의 내용과는 다른 현실을 너무나 잘 안다. 현지어 배우기?
늙은 뇌에 새로운 언어를 욱여넣는 건 고문이었다.
인사말 정도 배우다가 "차라리 영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게 낫겠다" 싶어 쉽게 포기한 게 내 케이스다.
역시 선진국 언어를 배워야지 하며
마트 주차장에서는 트렁크가 털리는 게 일상이었다. 유리창까지 박살내고 골프채도 슬쩍 가져가는 일이 허다했다. 도심에서는 소매치기가 워낙 많아서 항상 경계 태세로 다녀야 했고, 핸드백은 앞으로 껴안고 다니는 게 기본이었다.
행정 처리의 느림은... 아, 정말 성질 급한 한국인에게는 고역이었다. 안경 하나 맞추는 데 일주일 기다리는 건 기본이고, 은행 업무 하나 보려면 반나절은 각오해야 했다.
영어 선생님은 항상 열쇠꾸러미를 들고 다니며 문을 잠그고 수업을 했다. 도둑이 너무 많아서였다.
한국에서는 카페에서 노트북 놔두고 화장실 가는 게 가능한데 말이다.
그때 깨달았다. 아무리 "헬조선"이라고 비하해도, 안정성과 편리성만큼은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라는 걸.
새벽에 갑자기 치킨이 당기면? 클릭 몇 번이면 30분 안에 집 앞까지 배달된다.
택시 앱으로 차 불러서 어디든 안전하게 갈 수 있고, 지하철은 정시에 도착한다.
병원 예약도 앱으로 뚝딱, 관공서 업무도 온라인으로 해결된다.
밤 12시에 혼자 길을 걸어도 (비교적) 안전하고, 지갑을 떨어뜨려도 돌려받을 확률이 높은 나라. 무료 와이파이가 어디든 터지고, 공공화장실이 깨끗한 나라. 이런 게 얼마나 귀한 건지 해외에서 살아봐야 안다.
하지만 이상하다. 이렇게 편한 한국을 두고 왜 나는 여전히 해외봉사를 꿈꾸고 있을까?
아마도 그 불편함 속에서 느꼈던 특별한 무언가 때문일 것이다.
언어가 안 통해도 몸짓으로 소통하며 웃었던 순간들, 느린 행정 처리 때문에 짜증 나다가도 주말마다 벽돌 하나 하나로 자기 집을 만들어가는
현지인의 여유로움과 느긋하고 따뜻함.
물질적 풍요보다는 인간적 온기가 더 소중했던 그 시절. 아무것도 없어도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행복해하던 사람들. 그런 순수함 속에서 내가 가진 작은 지능과 재능을 나누며 진정한 지구촌 시민이 되고 싶은 마음.
결국 해외봉사란, 이 편리하고 안전한 대한민국을 일시적으로 포기하는 일이다.
클릭 한 번에 해결되던 모든 것들을 손으로 직접 하고, 발로 뛰어다니며 해결해야 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래도 가고 싶다. 언젠가는.
왜냐하면 진짜 여행은, 진짜 봉사는 편안함 밖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 안의 편견과 선입견을 깨뜨리고,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건 오직 불편함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니까 오늘도 나는 한국의 편리함을 만끽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꿈꾼다.
KOICA 봉사단 자문관으로 중남미 농촌개발에 5년을 바친 그 강사처럼, 언젠가 나도 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기를.
"인생 2막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아직은 꿈이지만, 그 꿈만으로도 오늘의 일상이 조금 더 특별해진다.
P.S. 그런데 정말로 가게 되면... 한국 치킨과 택배 시스템이 그리울 게 뻔하다. 인간은 참 모순적인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