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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8세대를 책임지는 사람

아파트 통장

월급 20만 원에서 40만 원으로, 그리고 치열해진 경쟁

농담으로

"준공무원이에요."

사람들에게 직업을 소개할 때면 이렇게 말한다. 아파트 통장,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4년이 됐다.

처음엔 별생각 없이 아파트 게시판에 붙은 모집 공고를 보고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지원서를 넣었는데, 큰 표차로 당선됐다.

그때만 해도 월급이 20만 원이었다. 솔직히 인기 없는 자리였다. 하지만 올해 40만 원으로 인상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명절 보너스 연 2회, 월 2회 회의수당까지 더하면 제법 괜찮은 부업이 됐다.

덕분에 경쟁률도 치열해졌고, 내년 6월 만료를 앞두고 벌써 내 밑에서 반장을 하시던 분께서 출마 의사를 밝히셨다.


베테랑의 황금기, 그리고 628세대의 무게

연임해서 4년 차가 된 지금, 나름 베테랑이라고 자부한다.

첫 2년은 뭘 하는지 배우고 시스템을 익히는 시기였다면, 지금은 나 스스로 일을 잘할 수 있는 황금기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9월부터 시작된 세대명부 조사는 정말 체력전이다.

내가 담당하는 628세대 중 비대면으로 처리되지 않은 가구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서명을 받아야 한다.

비대면 홍보를 아무리 해도 직접 방문해야 하는 세대가 훨씬 많다.


오후 7시 30분, 어르신의 부탁

8월 말, 관리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나이 드신 어르신인데 앱을 할 줄 몰라서 직접 오셨어요.

핸드폰 인증에 문제가 있어서 안 되신다고 하네요."

"9월 1일에 장부 나오니까 그때 찾아뵙겠습니다."

"저녁 7시 30분에 방문해 달라고 하시는데요."

알람에 동호수를 메모했다. 이런 개별 약속들이 하나하나 쌓여간다.


낮과 밤 사이, 미묘한 타이밍

오전에 동사무소에서 장부를 받고 몇 집 돌아다녔지만, 낮에는 거의 사람이 없다.

있어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사실 나도 이해한다. 집에 있을 때 초인종이 울리면 무시할 때가 많으니까.

잡상인이거나 인테리어 동의서 받으러 오는 사람들 때문에 불편한 방문이 많다 보니 그냥 없는 척할 때가 많았다. 그 심정을 아니까 원망할 수도 없다.

그래서 저녁 7시부터가 골든타임이다. 퇴근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그 시간쯤 방문하면 문이 열릴 확률이 높다. 하지만 너무 늦어도 안 된다. 작년에 저녁 9시에 방문했다가 나이 드신 분께 "이렇게 늦은 시간에 다니냐, 잠자다 깼다"라고 혼난 적이 있다.


3시간의 마라톤, 그리고 10시의 벽

오늘도 저녁 7시부터 시작했다. 한 동을 도는데 3시간이 걸린다. 2가구씩 있는 동도 10시가 되어야 끝난다.

1호부터 4호까지 있는 동은 더 오래 걸린다.

오늘도 부지런히 피크타임 3시간을 돌다 보니 거의 10시가 되어버렸다.

역시 마지막에 "늦은 시간"이라는 한 소리를 들었다.

10시를 넘지 않으려고 하는데, 참 애매하다.

누구에겐 10시가 학원 끝나는 시간이고, 누구에겐 아이들 재우는 시간이다. 아파트 헬스장에서 운동 마치고 오는 시간이기도 하고, 작가에겐 글 쓰는 조용한 시간이기도 하다.


밤 10시, 단톡방의 온도차

단톡방에서 밤 10시가 넘어 질문이 올라왔다. 책임감을 가지고 답글을 올려드렸는데, 어떤 분은 "감사하다"라고 하시고, 다른 분은 "시간이 오래됐네요. 카톡은 내일 하세요. 자야 되겠어요"라고 답이 왔다.

같은 10시라도 각자의 시간이 다른 것처럼, 세대조사를 하다 보면 어떤 분은 친절하게, 어떤 분은 무뚝뚝하게, 어떤 분은 귀찮아하듯이 각자의 반응이 다르다.

어떤 분은 "수고한다"며 음료수를 주시는데, 그럴 때 정말 감사하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아파트에 산다.


내년 선거를 위한 오늘의 땀

통장 일을 하면서 제일 바쁘고 힘든 일이지만, 불평 없이 해야 한다. 내년 선거 때도 당선되려면 친절하고 열심히 집집마다 방문해야 한다.

오늘 첫날인데 벌써 땀이 뻘뻘 난다. 628세대, 하나하나가 내가 책임져야 할 이웃이다.

월급 40만 원짜리 준공무원의 하루가 이렇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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