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자율정비단
전단지 떼는 여자의 고백
첫 번째 함정: 공문서의 정중한 거짓말
"안녕하세요. 화성시청 건축관리과입니다."
문자가 울렸을 때, 나는 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읽어보니 전형적인 관공서 스타일이었다. "쾌적한 도시미관 조성에 힘써주심에 감사드리며"로 시작해서 "품위를 유지하여 정비하여 주시기 바라며"로 끝나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차가운 문장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정중한 문자 뒤에 숨어있는 진짜 메시지를. '시민들이 너희 때문에 화내고 있으니까 좀 조용히 해라.' 그게 진짜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함정: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족쇄
시민자율정비단 조끼를 입을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든다. 마치 정의의 사자가 된 듯한 기분과 동시에, 누군가의 절실함을 짓밟는 악역이 된 듯한 기분이 공존한다.
전단지 하나를 뜯을 때마다 상상한다. 새벽부터 나와서 이 전단지를 하나하나 붙인 누군가의 모습을. 월세 내기 위해, 아이 학원비 마련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홍보하는 소상공인의 간절함을.
그런 상상을 하면 손이 멈춘다. 특히 헬스장 전단지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이 작은 종이 한 장이 누군가에겐 생명줄일 텐데...'
세 번째 함정: 운명이라는 이름의 덫
그런데 세상은 참 아이러니하다. 어느 날 당근마켓을 뒤적거리다가 눈에 띈 글이 있었다.
"PT 3회 무료 나눔�"
클릭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주소를 보니 내가 그토록 미안해하며 전단지를 떼어냈던 바로 그 헬스장이었다. 마치 내가 뜯어낸 전단지들이 다른 방식으로 나를 찾아온 것 같았다.
'이건 운명이야. 미안했던 마음도 달랠 겸 한 번 가보자.'
헬스장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인바디도 재고, 트레이너와 상담도 받았다. '아, 괜한 죄책감이었구나. 이렇게 좋은 곳인데.' 그 순간까지는 모든 게 완벽했다.
"그런데 3회 이용하시려면..."
트레이너의 말이 이어졌다.
"하루 이용료가 3만 원이에요. 3일이니까 총 9만 원 결제해 주시면 됩니다."
세상이 정지했다. 밖에서 보던 다른 헬스장 광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월 5만 원', '월 3만 원'... 그런데 여기서는 3일에 9만 원이라고?
그제야 깨달았다. 당근마켓에 글을 올린 사람이 헬스장 관계자였다는 것을. 내가 그토록 미안해하며 떼어낸 그 전단지의 주인이, 결국 더 교묘한 방식으로 나를 낚아챈 것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순간이었다.
네 번째 진실: 50원의 심리학
돌아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일의 본질이 보였다. 종이 전단지 한 장을 떼고 전후 사진을 찍으면 50원. 겨우 50원이다.
신호등에서 빨간불을 기다리는 시간이 심심하면 주변을 둘러본다. 전봇대에, 가로등에, 어김없이 붙어있는 전단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에는 순수한 재미가 있었다. 지저분한 거리를 깨끗하게 만든다는 뿌듯함도 있었고.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한 달 열심히 해봤자 통장에 찍히는 돈은 기껏해야 몇만 원. 알바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멈출 수 없다. 중독성이 있다. 마치 게임에서 경험치를 쌓는 것처럼, 하나씩 떼어낼 때마다 느껴지는 작은 성취감. 그리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는 변명 같은 사명감.
다섯 번째 격차: 1,600원의 유혹
현수막은 완전히 다른 세계다. 한 장당 1,600원. 전단지의 무려 32배다.
하지만 그 돈에는 이유가 있다. 높디높은 곳에 걸린 현수막들은 마치 "감히 나를 건드려보라"라고 도전장을 내미는 듯하다. 사다리 없이는 꿈도 꿀 수 없는 높이에,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나는 현실적이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1,600원을 벌 필요는 없다. 안전하게 걸어 다니면서 할 수 있는 일만 한다. 어차피 취미 겸 환경보호 차원에서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 세상에는 진짜 프로들이 있다. 트럭과 사다리로 완전무장하고 도시를 누비는 사람들. 그들은 월 150만 원을 번다고 한다. 나와는 아예 다른 차원에서 이 일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여섯 번째 모순: 선거철의 아이러니
요즘 선거철이라 거리에 현수막이 넘쳐난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모순이 드러난다.
정당 현수막은 절대 건드릴 수 없다.
생각해 보라. 생계를 위해 간절히 홍보하는 소상공인의 전단지는 하루에도 수십 장씩 떼어내면서, 이미 충분히 부유한 정치인들의 뻔한 공약 현수막은 고스란히 놔둬야 한다니.
누구를 위한 도시미관인가? 누구를 위한 품위인가?
일곱 번째 깨달음: 진짜 품위란 무엇인가
화성시청은 "품위를 유지하라"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에 품위는 없다.
죄책감을 느끼며 누군가의 생계수단을 제거하고, 무료라는 미끼에 낚여 더 비싼 돈을 지불하게 되고, 공평하지 않은 기준으로 일을 해야 하는 이 모든 상황에서 과연 품위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시민자율정비단이라는 그럴듯한 이름 뒤에 숨어있는 이런 현실들을 보면, 과연 이 모든 게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어쩌면 진짜 품위는 이런 모순들을 당당히 인정하고, 좀 더 공정한 기준을 만들어가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여덟 번째 결심: 그래도 나는 나간다
오늘도 나는 조끼를 입고 거리로 나선다. 여전히 죄책감과 함께.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 일이 가진 모든 모순과 아이러니를. 그리고 그 속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역할이 있다는 것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모순투성이라도 괜찮다.
중요한 건 계속 걷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 진실을 알아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