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7일. 금요일. 눈을 뜨면 다시 그날 아침이다.
전날 늦게까지 책을 보다가 새벽녘에야 잠에 들었다. 남편이 전화를 받으며 안방으로 오는 소리에 무겁게 눈을 떴다. 눈꺼풀 안에서 젖은 눈곱이 쭈욱 붙었다 떨어졌다. 남편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불행한 소식을 전하는 전화라는 느낌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누가 사고가 났나. 어딘가에 쓰러져 있었나. 순간적으로 다른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던 것 같다. 그 사람이라면 내가 그나마 덜 불행하다고 여길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의 얼굴을.
-바로 나갈 준비 해야 할 것 같아. 자기 번호로 다시 전화한다고 했으니 받아봐.
남편이 가져다 놓은 내 핸드폰은 침대 끝 모서리에 놓여있었다. 뒤 이어 후스콜이 진동하는 핸드폰 화면에 경희대학병원이라는 글자를 띄웠다. 컴컴한 방 안이 미세하게 좌우로 흔들렸다. 오전 8시 21분이었다.
심폐소생술을 담당했던 의사의 전화였다. 김영만 님이 청량리역 2번 환승센터에서 쓰러지신 걸 시민이 연락해 구급차로 이송했다고. 그 이후 지금까지 약 한 시간가량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지만 의식이 한 번도 돌아오지 않으셨고, 아빠는 이미 사망한 상태라는 말이었다. 해 볼 수 있는 의료적 조치는 모두 한 상황이라고. 가족의 동의가 있어야 CPR을 중지할 수 있는데, 중지해도 되겠는지를 물었다. 내가 덜덜덜 떨고 있으니 아인이가 와서 내 손을 잡았다. -엄마 괜찮아?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순간을 말로 옮긴다는 것은 애초부터 가능한 일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날의 일을 왜 글로 남겨두려고 할까. 너무 무섭고 두려운데 그것마저도 내가 아끼던 아빠의 일이라 기억하고 싶은 거라면. 그게 설명이 될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애도 방법이 글쓰기뿐이어서. 글로라도 남겨두면서 아빠를 기억하고 떠올리고 싶어서. 잊고 싶은 그날마저도 쓴다. 순서가 바뀌었다면 아빠는 날 어떤 방법으로 애도했을까.
전화를 받고 떨리는 마음으로 옷을 주워 입는데, 오늘 만나기로 했던 A 선생님과 M이 떠올랐다. A 선생님은 오늘날 만나려고 아들을 방과 후에 맡긴다고 했는데, 오늘 볼 수 없겠다고 빨리 연락 줘야 아들을 안 보내지. 내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놀랄 텐데. M이 나를 데리러 오기로 어제 전화로 약속을 했었지.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아빠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고서도 사람은 이런 생각을 먼저 하는구나 싶어 몸이 떨렸다. 산 자들은 당장 산 사람들의 일을 생각하지.
택시를 잡아타고 회기역 경희의료원으로 가달라고 기사님께 말했다. 그리고 호주에 있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아빠를 보러 가는데 나 너무 무섭다고, 빨리 한국으로 오라고. 전화기 너머로 언니가 크게 소리 내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전 아빠 장례를 치른 친구 H에게도 전화를 했다. 뭘 준비해야 하는지. 지금 난 당장 뭘 해야 하는지.
아빠가 꽤 오래 혼자 살았던 그 매향동 집에 우리 가족은 1989년 입주했다. 내가 7살 때다. 엄마는 내가 열 살이 되던 해 집을 나갔고, 그 이후로는 쭉 우리 세 가족이 그 집에서 살았다. 열세 살이던 언니는 그때부터 집안의 모든 살림을 맡아서 했다. 아침마다 내 도시락을 싸고 머리를 묶어주었다. 언니가 집 청소를 시작하려고 하면 나는 밖으로 도망을 치곤 했는데 그러면 언니가 화를 내는 소리가 뒤에서 들리곤 했다. 그 집에서 아빠는 혼자 우리 둘을 키웠다. 내가 아이들을 낳고 나서는 매일같이 아이들의 하원을 맡아서 해 주셨다. 나는 입버릇처럼 '아빠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해. 연수도 못 가고, 글도 못쓰고.'라고 말했다. 일주일에 네 번씩은 아빠와 나, 그리고 내 아들 둘이 함께 저녁을 먹었다.
전화를 받았던 그 전 주 토요일에는 물꼬방 연수를 간 나를 대신해 아빠가 아이 둘을 보았다. 점심시간 즈음 전화해 아이들하고 뭐 먹고 있냐는 말에 아빠는 씩 웃으며 "라면 먹지?"라고 대답했었다. 냉장고에 먹을게 얼마나 많은데 라면을 먹냐는 내 타박에 "애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라면이 어때서."라고 말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타박하는 소리가 들리자 옆에서 아인이가 "할아버지 전화 끊어. 끊어."라고 말하며 낄낄낄 웃던 소리.
다녀와서 몸살이 난 나를 위해 그 주 월요일에 아빠는 약국에서 감기약을 사 가지고 집에 오셨다. 그리고 나는 안방에 누워 내리 깊은 잠을 잤고, 9시가 넘을 때까지 아빠는 거실에서 아이 둘에게 그림을 그려주고, 책을 읽어주셨다. 간간히 아빠가 책 읽는 소리. 아이들과 몸싸움하며 노는 소리. 과일 깎아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이들이 잘 시간이 되자 "집에 간다."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저 내 몸이 무거워 그 뒷모습만 바라봤다. 아빠 잘 가. 신발을 신고 나가는 아빠의 바지 뒷자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었다. 그게 끝이었다.
택시는 자꾸 엉뚱한 곳으로 도착했다. 다 왔다고 하고는 여기가 아니었다고 하고, 30분을 더 달린 뒤에는 아까 거기가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아저씨 지금 저한테 그러시면 안 돼요. 하는데 눈물이 막 비어져 나왔다. 아저씨. 아빠 빨리 보러 가야 한단 말이에요. 아빠 지금 응급실에 혼자 있어요.라고 말하는데 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오전 서울의 길은 꽉꽉 막혀 시원하게 달릴 줄을 몰랐다. 시간은 이미 10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이대로 길 위에서 심장이 터져 폭발해버릴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아아악. 나는 그때부터 택시 안에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비명인 것도, 통곡인 것도 같았다. 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아빠는 벌써 죽어버렸어. 언니는 아빠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바로 달려 올 수도 없어. 나는 왜 여기서 병원까지 가지도 못해서 길 위에서 두 시간째 이러고 있어. 부옇게 들뜬 시야 안에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운전대를 잡고 계시는 등이 작은 기사 아저씨가 보였다. 목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난 그날을 잊어야 할까. 기억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