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도착해 아빠 이름을 말하니 나를 응급실 내 소생실로 안내했다. 소생실 안에는 흰 천으로 덮여있는 아빠의 맨발이 보였다. 사시사철 맨발로 산을 타는 것을 즐겨해 스스로 붙인 이름, 맨발의 청춘. 그 두 발만 흰 천 밖으로 삐죽이 나와있었다.
의료진은 부검을 해 보지 않는 한 사인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갑작스런 심장마비 일수도, 뇌 질환 일 수도. 분명한 건 쓰러지고 얼마 안돼 신고가 들어왔고, 병원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몸에 온기가 있었다고 했다. 처음부터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면 심폐소생술을 실시하지도 않는다고. 최선을 다했지만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의료진 들의 말에 나는 고생하셨다, 애써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만 주억거렸다. 짐은 없었느냐는 내 질문에 아빠가 메고 있던 가방이 옆에 있으니 살펴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뒤이어 경찰이 도착했고 경찰이 보는 앞에서 비닐에 쌓여있던 아빠의 등산 가방을 열었다.
가방 제일 위에는 아빠가 자주 드시던 옥수수 식빵 두 개가 봉지에 쌓여있었다. 그리고 가지런히 깎아 넣은 사과 반 쪽, 그리고 컵 쌀국수, 보온병에 담은 물. 막 준비한 음식이 들어있는 걸로 보아 아빠는 산에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유난히 추웠던 그날 아침. 새벽부터 무료로 탑승할 수 있는 전철을 타고 청량리역 환승센터까지 그 이른 시간에 찾아간 것이다. 아빠는 어느 산을 가려고 했던 걸까. 아빠가 쓰러졌다고 신고된 시간은 아침 7시 4분이었다. 내가 세 시간 반이나 지나 도착했네. 너무 늦었지.
애써 참았던 통곡이 비닐에 쌓인 식빵과 컵라면을 보고 터져 나왔다. 아빠는 슈퍼에서 사는 싸구려 식빵을 자주 사다드셨다. 가끔씩 그 빵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주어 내가 제과점 빵 사드시라고 타박을 했던 적이 있었다. 방부제 잔뜩 들어있는 걸 왜 먹느냐고 하면 아빠는 "맛만 있다!" 하며 코웃음을 치셨다. 그리고 꼭 산에 갈 때마다 컵라면과 뜨거운 물을 챙겨 길을 나섰는데, 산 위에서 먹는 컵라면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분이었다. 그런 까닭에 우리 아들들도 할아버지 따라 산에 가면 컵라면을 얻어먹을 수 있다고 좋아하고는 했다. 아인이가 세 살 때 허벅지에 가득 면발을 흘려가면서도 후후 불며 할아버지와 광교산에서 라면을 먹던 사진을 본 기억이 났다. 아빠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구나. 오늘 자신에게 그리고 둘째 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길에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까닭에 경찰과 해야 하는 여러 절차들이 남아있었다. 경찰관님은 그런 부분들을 경황이 없는 내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천천히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경찰서에서는 청량리역 환승센터 CCTV에서 따온 영상을 보여주셨다. 영상은 너무 흐릿하고 희미해 사람이 거기 서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여기, 여기 보이시죠? 아버님 서 계신 거. 이렇게 서 계시다가 갑자기 앞으로 쓰러지셨어요. 이렇게. 차도 쪽으로. 차들이 피해 가네요. 그래도 사람들이 이렇게 차도 밖으로 끌어냈어요. 처음 신고한 분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건 알려드릴 수 없게 되어있어요. 그저 마음으로 생각하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아요.
급하게 빈소를 차릴 장례식장을 예약하고, 가입해 둔 상조회사에 전화를 했다. 일회용품을 보내준다던 공문을 수소문해 신청하고 카톡상으로 언니와 아빠의 영정사진으로 쓸 사진을 골랐다. 아빠가 가장 행복하던 순간의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쓰고 싶었다. 행복하던 때, 가장 환하게 웃던 때라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순간이 있었다. 2017년 가을, 아빠와 언니, 내 신랑과 첫째 아인이가 함께 떠났던 17일간의 뉴질랜드 여행. 그 여행 중 트위젤에서 아빠가 연어 한 마리를 통째로 사 회를 떠주던 날의 장면이다. 평생 경제적으로 어렵게 산 까닭에 서로 상처를 많이 주고받으며 살았는데. 언니의 호주 영주권 취득 기념으로 무리해 떠난 여행이었다. 횟집 주방장이었던 예전의 기억을 살려, 아빠는 한국에서부터 싸온 칼로 정성스럽게 연어회를 떴는데 그때 찍었던 사진 속의 아빠는 오랜만에 진짜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표정이었다. 그 사진으로 하자. 이때 아빠 정말 좋아 보이지? 응?
언니는 짐을 다 싸 두고 방에 혼자 앉아있다고 했다. 가장 빠르게 출발하는 비행기가 내일 아침에 있다고. 당장 떠날 수도 없어서 혼자 앉아 아빠 생각을 하고 있다고. 큰 일 너 혼자 치르게 해서 너무 미안하다고 말하며 언니는 울었다. 나는 정신없이 이것저것 수없이 결정하고, 예약하고. 준비하느라 두려움과 온전하게 마주할 시간이 없었는데. 언니는 얼마나 두려울까 싶었다.
하루 종일 손님과 친지들을 맞고, 밤이 되니 사람들이 자꾸 나에게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한다고 말했다. 내일은 더 힘들 거라고. 발인할 때까지 상주가 빈소를 잘 지키고 있으려면 잘 먹고 잘 자면서 힘을 비축해야 한다고. 그래서 애써 눈을 감으려고 했는데 눈만 감으면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제 본 아빠 얼굴이 떠오르고. 아빠가 부르던 노래가 귓가에 쟁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 아빠의 뒷 바짓단. 그 장면들이 나를 끈덕지게 놓아주지 않았다. YS친구들이 빈소에서 밤을 새 준다기에 오래오래 시끄럽게 떠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시끄러운 소음 속에 누워있으니 조금은 눈물을 참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빠는 늘 사소한 말들도 가락을 붙여 노래로 부르는 걸 좋아했다. 가장 많이 부르던 짧은 노래는 "할아버지 집에 간다"라는 노래다. 아빠. 힘들지? 이제 퇴근해.라고 말하면 저 노래를 부르며 현관을 나서시고는 했는데. 너무 잘 만들었던 가락이었던 탓에 "할아버지 퇴근한다.", "할아버지 떡 사 왔다." 등의 많은 변주가 탄생하던.
마지막으로 눈감으며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라도 두 아이 키우며 매일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둘째 딸 걱정을 하지는 않았을까. 눈 감는 순간에 "할아버지 집에 간다."라고 그 익숙한 노래를 불렀다면 참 좋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