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깡촌에서 싱글맘 생존기
한국은 어버이날이 있어 부모님들에게 같은 날 감사의 마음을 전하지만, 호주는 어머니 날과 아버지 날이 다르게 짜여있어서 매년 나는 우리 가족에겐 필요 없는 아버지 날이 싫었다. 매년 9월의 첫 번째 일요일이 아버지 날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 날이 되면 일부러 아이들을 위해 바쁘게 스케줄을 짜고, 아이들과 지내려 노력했었다.
초등학교의 유치원 과정인 킨디에 작은 아이가 입학하던 해, 작은 아이가 처음으로 학교에서 보내게 될 아버지 날이 무척 마음에 걸렸다. 혹시라도 아빠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없음을 새삼 느끼는 날이 될까 봐. 아버지 날이 다가오면 학교에서는 그날을 축하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들썩이고, 학교 수업 또한 그런 이벤트들로 짜여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작은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걱정이 섞인 미안한 마음과 함께 수업이 끝난 학교로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작은아이가 초등학교 유치원 킨디 에 다니던 해, 아버지날이 있는 끼어 있는 9월의 첫 번째 주, 금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나의 우려와는 달리 작은 아이는 그날 학교에서 만든 삐뚤빼뚤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손에 들고 함빡 웃으며, 항상 그렇듯 씩씩하게 뛰어나왔다. 그리고 먼저 나와서 나와 같이 서 있던 큰 아이에게 당연한 듯이 카드를 내밀었다.
" 아버지 날 축하해"
한다. 당시 큰 아이 나이는 10살이었다. 나와 큰 아이는 동시에 카드를 펼치고 읽었다. 거기엔..
" 아빠 같은 나의 형에게"
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면서 작은 아이는 말한다.
" 나는 형아가 아빠야.. 아빠처럼 나한테 모든 거 다 해 주니까.."
나는 순간 큰 아이가 어린 마음에 내가 왜 아빠냐며 카드를 거절해서 웃고 있는 작은 아이를 실망시킬까 겁이 났었다. 하지만 카드를 형에게 주고 나서 형의 다음 반응을 기대하며 웃고 서 있는 자신의 동생을 큰 아이는 꼭 안아 주었다.
" 물론 내가 아빠지.. 카드 고마워"
전혀 예상치 못한 작은 형제들의 행동이었다.
둘은 잠시보다는 조금 오래 그렇게 서로 안고 있었다. 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힘들게 참아야 했다.
언젠가 처음으로 산 작은 아이의 작은 자전거 조립조차 내가 하지 못하자, 큰 아이는 그 작은 손으로 밤새 조립을 해서 작은 아이를 웃게 만들고, 자전거를 넘어지면서도 열심인 작은 아이보다 더 열심히 작은 아이를 뛰면서 따라다녔다.
무슨 일이 생기면 작은 아이는 " 힝아!!"
하면서 큰 아이를 찾았고, 손재주 좋은 큰 아이는 뭐든지 척척 해결해 주었다.
처음 우리 셋이 집을 도망쳐 쓰러질 것 같은 써니브룩의 밤들을 보낼 때, 작은 아이는 밤새 울면서 집안을 걸어 다니는 몽유병을 한동안 겪었을 때도 낮에 일하면서 힘든 엄마를 대신해
" 엄마는 자요.. 내가 따라다닐게요"
하면서 동생의 뒤를 졸린 눈을 비벼가며 혹시 동생이 다칠까 봐 이것저것 미리 치우며 따라다니다, 동생이 침대로 다시 돌아가면 그제야 동생 침대에서 같이 잠이 들었던 형.
개구쟁이 동생이 만들어 놓은 모든 말썽을 덮어주고 엄마에게는 말도 하지 않고, 모든 걸 뒤집어쓰던 형.
방학이면, 일나 간 엄마대신 동생을 돌 보던 아직도 너도 아기였던, 나의 큰 아들..
엄마가 혹시라도 동생의 마음을 몰라 다치게 할까 봐, 항상 동생의 대변인이 되어 자기의 작은 등뒤로 더 커버린 동생을 숨기는 형.
이제는 작은 아이 키가 큰 아이보다도 더 커져 버렸어도, 여전히 작은 아이는 큰 아이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따른다.
이번 주 일요일이 아버지 날이다.
작은 아이가 큰 아이 좋아하는 고기뷔페에 갈 거라며, 알고 있으라고 미리 얘기한다.
두 형제는 이렇게 서로에게 큰 의미가 되어주고, 약한 엄마를 강하게 키워줬다.
사랑한다.. 아들들아..
아이들이 어렸을때 사진입니다.
지금은 왼쪽의 작은 아이가 더 크지만 ,,,
자기들 사진 썼다고 고소 하지는 않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