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깡촌에서 싱글맘 생존기
2016년 10월 16일 일기..
하루가 아주 느린 속도로 천천히 지나간다. 고장 난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세탁만 마친 세탁기가 통 안에 물을 가득 안고는 서 버린다.
헹굼 버튼을 누른 후 기다렸다가, 수차례 헹굼을 마친 세탁기가 마지막 헹굼을 하기 위해 통 안에 물을 가득 받았을 때, 세탁기 뚜껑을 열고 섬유 유연제와 소독제를 넣고 뚜껑을 닫는다.
잠시 후 터억... 소리를 내며 헹굼을 마친 세탁기가 다시 멈추면, 또다시 세탁기로 가서 탈수 버튼을 누른 후 거실 소파 위에 눕는다.
맨발 위로 떨어지는 햇살이 따듯하다. 이제는 탈수가 다 되어 세탁이 모두 끝났다는 마지막 알림이 울릴 때까지는 마음 놓고 휴식을 가져도 된다 하는 나 자신에게 주는 공식적이고도, 아주 정당한, 그 어떤 갈등도 없는, 내 모든 세포들에게 쉼을 주는 그런 순간이다. 늘 긴장하며 불안으로 눈치를 많이 보며 산 탓일까. 내게 주는 그 잠깐의 짧은 휴식에도 마땅한 이유를 붙여야 하는 걸 보면..
빨래를 널기 위해 바구니 하나 가득 빨래들을 담아 햇살이 조금 따가운 오전의 뒷마당으로 나온다. 바람도 마침 알맞다.
집 구조상 뒷마당이라 부르고는 있지만 사실 뒷마당은 동네 전체를 굽어 볼 수 있는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한 앞쪽이다. 집이 돌아 앉아 있는 탓이다. 집 앞쪽은 산을 바라보고 있는 형세로 처음 집을 디자인한 사람의 의견이 무척 궁금한 부분이다.
빨래 널을 곳이 마땅치 않아 장대 서너 개와 , 마당 구석에 서 있던 키 작은 자카란다 나무를 이용해 한국식 재래 빨랫줄을 만들었다. 어린 두 아이들과 잡아라.. 당겨라.. 하며 만든 탓에 빨래가 빨랫줄에 많이 걸리면 빨랫줄은 오뉴월 엿가락처럼 늘어져 빨래가 땅에 닿는다. 그래서 기다랗고 튼튼한 빨래 장대 하나를 더 장만해 빨랫줄 중간 부분에 걸쳐놓고 끄엉차 하며 올려 세운다. 여간 힘든 게 아니고 기술도 필요하다. 자칫 기술이 부족해 장대의 중심점을 잘못 맞추게 되면, 장대는 술 취한 고주망태 영감처럼 땅바닥에 드러눕게 된다. 그러면 고장 난 세탁기와 처음부터 저 과정을 다시 걸쳐야 한다.
안 하고 싶다.
얼마 전 일을 하러 가기 위해 우리 집에 들렀던 욕쟁이 캐리가, 새벽 일찍 널어놓은 빨랫줄의 빨래들을 보면서 빨래건조기가 없냐고 물었다. 나는 있기는 하지만 햇살이 너무 좋아서 그런다며 "saving sunlight"라는 표현을 썼다. 햇볕이 아까워서 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알아 들었는지 아니면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 했던 건지 캐리는 말이 없었다.
어릴 적 햇살 좋은 날이면 엄마가 항상 하시던 말씀..
"아이고... 볕이 아깝다...."
뭐라도 내다 말리셨어야 했다. 그래서 우리 집엔 항상 채반에 널린 호박이나, 무말랭이, 작은 장독대위에 널린 고추나, 처마에 걸린 무청으로 엄마는 뭐든 말리셨다.
뜨거운 호주 여름..
나는 이 햇살도 아까워한다.
엄마처럼...
내가 말리는 건 빨래가 아니다.
고향의 알맞은 온도의 햇살을..
엄마의 주름 자글한 얼굴을...
마을 뒷 산의 거북 바위를...
앞 개천에 흐르던 맑은 개울을..
그리고
작은 냄비에 멸치만 넣어 졸여 끓인 김치찌개를 둥글게 둘러앉아 먹던 우리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이 찐찐한 그리움을 나는 말리고 있는 것이다.
말라가는 빨래들을 마당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바라본다. 이 그리움도 말려주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