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쟁이들의 대화

파란 방갈로의 노래 8

by 블루



다가오는 폴의 얼굴에는 아이처럼 장난스러운 웃음이 한가득이다.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무심코 넘기던 화려한 잡지의 한 페이지처럼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자 처음 보던 그의 낯선 표정에 바보처럼 두려워졌다. 정작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은 나였는데도.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요"

그는 내가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사라가 아는 것은 스테이시가 아는 것이고, 스테이시가 안다는 건 곧 스몬도 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가까워질수록 들꽃을 들고 있는 손을 조금씩 들어 올리며 다가온다. 나의 예상이 틀리길 바랐는데... 그 꽃다발이 나를 위한 것이 맞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그만 두어 걸음 물러섰다. 내가 뒤로 물러서자 폴은 걸음을 멈추었고, 손을 내렸다.

"꽃을 싫어 하나요?"

그가 묻는다. 꽃이 싫으냐고?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또 있을까?

"아뇨. 좋아합니다. 하지만 누가 들고 있는 꽃인지에 따라 다르겠지요"

산속의 모든 것들이 우리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 너무 조용했다. 잠시 죽을만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오늘쯤엔 당신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늘은 더 무서운 얼굴이네요"

나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나는 그냥 다음 주부터는 여기로 일을 하러 오지 못한다는 말을 전하러 왔을 뿐이에요. 그동안 감사했어요."

나는 감사하다고 말은 했지만 나의 목소리는 전혀 감사를 담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의 시선을 들고 있던 꽃에게 잠시 두었다.

"어제 누나는 농장에서 있었던 얘기를 스테이시에게서 전해 듣고 걱정을 하더군요. 당신이 오해를 할 수도 있겠다고.. 누나가 옳았군요"

그의 얼굴에선 이미 웃음이 사라지고 없었고, 나를 따라 하는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투는 여전히 낮고 부드러웠다.

"누나를 쉬게 하고 싶었어요. 누나는 아직 일을 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나는 누나가 이제는 편했으면 했고, 당신을 생각해 냈던 것뿐이었어요. 당신이 없었더라도 누군가가 누나를 대신하게 했을 겁니다"

너무 앞섰다. 나의 못난 자존심은 이렇게 또 열등하게 작용되었던 것이다. 나는 당연히 '그런거였군요.미안합니다'라고 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뒤섞여 목구멍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절박하게 일을 찾으며 앞뒤 잴수 없었던 그때의 나를 미워하면서도, 그러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도 역시 똑같이 하리라는걸 아는 지금의 나는 더 싫었다. 나는 안다. 살아야 했으니까. 그렇기에 더 쓰라리다. 그러기에 나의 변명은 할수가 없었다. 그냥 폴이 나를 못 된 사람으로 생각하게 놔 두는것이 나에 대한 벌이라 생각했다.


" 그리고 당신도 웃게 해주고 싶었어요"


제발 더 이상 아무 말도 말아줘..라는 내 마음과는 달리 나의 입은 묻고 있었다.

" 왜죠?"

" 미안하지만 왜 당신이 여기로 오게 됐는지 알게 되었답니다"


처음 이곳으로 쫓기듯 들어오고 나서 나는 남편의 변호사에게 사전처럼 두껍던 재정동의서와 이혼서류를 받았다. 그때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또한 그 서류들이 무얼 뜻하는지 조차 감을 잡을 수가 없어 나를 돕던 집주인에게 보여주며 자문을 구했었다. 집주인 부부는 나의 허락을 구한 후 그 서류에 대해 더 잘 알 것 같은 사람들에게 보였다 했었다. 그러니 폴이 그 서류들을 읽어 봤다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당장에 변호사를 구했어야 했는데 형편이 그렇지 못했던 나는 남편의 변호사가 나의 변호사를 소개해 주기전까지 그렇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 나의 이혼서류는 '이달의 권장도서' 가 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착한 폴도 다른 사람들처럼 나의 이야기를 읽고 동정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받던 그 익숙한 동정이, 오늘은 폴에게서 만큼은 받기 싫어졌다. 간사하기까지 한 것이다.


" 그냥 당신이 웃었으면 했어요"

"왜죠?"

나는 묻지 않아도 될 물음을 또 던졌다.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은 잠깐 빛을 내는 것 같았다. 그는 당황해 하고 있었다.


" 나도 모르겠어요. 그냥 당신이 웃었으면 좋겠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어요. 이유는... 젠장.. 나도 모르겠어요."


어색한 고요가 다시 흘렀다. 그가 가벼운 욕설을 처음으로 썼다. 하지만 그의 말에선 따듯한 나무 욕조의 온도가 느껴졌고, 톡 쏘는 향기가 났다. 나를 풀어지게 하고 결국엔 울게 만드는 그 편백나무 욕조처럼. 그러나 나는 결코 그의 앞에선 울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어떨 때는 당신의 웃는 얼굴만 볼 수 있다면 백만 불이라도 치를 수 있겠단 생각도 했어요..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고요.."

그의 시선이 다시 꽃위에 놓인다.

" 그렇다고 그건 동정은 아닌 것만은 확실해요.. 하지만 여전히 그 이유는.... 나도 몰라요"

그는 말이 많아졌고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내가 한 번만 더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그는 분명 나 대신 울 것만 같았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들고 있던 들꽃다발을 주차장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며 항복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제야 나는 그의 손바닥에 상처가 생겨 피가 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상처는 그가 어떤 도구를 써서 억센 들꽃을 마련한게 아니라, 내가 온다는 말을 전해 듣고 급하게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웃는 내 얼굴을 기대하면서... 아! 폴..그는 그 이유를 모른다고 몇 번이나 내게 얘기했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것만 같았다. 그 상처를 보자 나는 그에게 달려가 그를 안아주고 싶어졌다. 하지만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온몸이 떨릴 만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나는 모르는 척 해야만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뇨 당신이 느끼는 그 감정은 동정이에요' 라고 말하고 싶었고, 그가 스스로 깨달았으면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구질구질한 내 형편에 저 착한 사람을 끌어내리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내가 그에게 해줄수 있는 가장 큰 배려라고도 생각했다.하지만 그 동정에라도 매달려 이 지긋지긋한 삶의 긴장을 털어내고 싶기도 했다. 지금 내가 달려가면 모든것이 쉬워질것이란걸 나는 알고 있었다. 영악하기 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힘들게 싸우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달려가려는 나의 다리를 몹시 더 힘을 주고 잡고 있었다.


" 이제 이 세상에 있는 꽃들은 모두 다 당신 거예요. 나의 손엔 그 어떤 꽃도 들려 있지 않을 거니까요"


그건 마치 이별을 고하는 남자의 말처럼 들렸다. 사귄 적도 없던 남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돌아서서 키오스크로 향했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 난 사람처럼 다시 돌아섰다.


" 그 꽃은 당신이 매니저가 된 것에 대한 축하의 의미였어요. 그러니 신경 쓸 것 없어요"

나는 내 다리만큼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알아요"

솔직하지 못한 그의 말에 똑같이 솔직하지 못하던 나의 답이었다.


' 알아요....' ' 알아요...'

나는 나 혼자만 들릴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되풀이를 하였다. 그건 그와 나의 이야기를 여기서 이렇게 끝맻음을 짓고, 이 말도 안되는 꿈에서 깨기를 바라는 주문이었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등을 돌리고 잠시 서있던 그가 다시 돌아선다. 나는 차유리를 내렸다. 그가 말한다.


" 그리고 언제든 와서 욕조를 사용하세요. 그리고... 나도 여기 있을게요. 언제든 오세요"


꿈속으로 그는 여전히 나를 잡아 당기려 하고 있었다. 악몽이다.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