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머 크리스마스 ( 하)

파란 방갈로의 노래 10

by 블루

블레싱 홀에 도착하니 벌써 케이터링 회사에서 나온 트럭들이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그들에게 음식을 진열할 지정된 공간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가지고 온 테이블들을 길게 이어 붙였다. 그 위에 마리가 직접 골라두었던 크림색의 천에, 은색실로 수를 놓은 테이블 보를 깔고 음식을 진열했다. 일곱 명의 행사를 도울 웨이트리스들과 함께였고, 그들은 하얀색 셔츠에 은색의 조끼를 입고 검은색의 긴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홀은 어제까지 공들여 준비한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더불어 더없이 아름다웠다. 나는 분주히 돌아다니며 마리가 주문한 음식엔 이상은 없는지 그리고 테이블 위의 식기들도 마리가 원한대로 정확히 놓여 있는지 확인을 했다. 나는 어느 것 하나 마리의 주문과 요구에 틀림이 없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사람들이 도착할 시간이 되자 나는 역시 마리가 미리 골라둔 Jim Reeves의 캐럴을 틀었다. 완벽했다. 블레싱 홀은 완벽한 여름 크리스마스로 빛나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고맙게도 내가 정해준 자리에 조용히 앉아 엄마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엄마가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는 게 신기하기도 했겠지만, 엄마가 일을 잘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미리 집에서 부탁을 했던 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았다. 나를 주시하고 있다가 어쩌다 나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아이들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의젓하게 엄마가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던 그 맑은 눈을 보면서 나는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었다.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나의 눈에 익은 얼굴들이었고, 마리가 따로 초대한 손님들도 있었다. 우리 아이들도 아는 친구들을 만나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나의 우려와는 달리, 너무도 좋은 사람들이 모여 행복한 파티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피터와 마리도 홀에 도착했다. 그러나 나는 마리의 옷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주었던 그 붉은 드레스는 아니었어도, 나는 마리가 그것과 못지않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나타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가 입고 있던 옷은 피터와 똑같이 맞춘, 녹색 바탕에 루돌프 사슴이 귀엽게 그려져 있는 티셔츠와 흰색의 칠보 면바지였다. 그리고 그때까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람들의 옷차림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도 마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편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간간히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어울릴만한 귀걸이나 목걸이로 포인트를 준 것이 다였다. 한 사람도 마리가 내게 권한 드레스 같은 것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입고 있는 긴 스커트가 오버를 한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나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깨닫는 순간 내 침대 위에 놓여 있는 그 붉은 드레스가 떠 올랐다. 그러자 내 주위에 공기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구토를 할 것처럼 내 속은 메스꺼웠다. 나는 밖으로 뛰쳐나가야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없을 것 같은 건물 뒤쪽으로 달렸다. 뜨거운 오븐 속 같던 그날의 온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리의 얼굴을 봤고,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던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마리는 내게 일부러 그 야한 붉은 드레스와, 굽이 높아 반짝이던 그 구두를 신게 하고 이 파티에 나타나도록 의도했던 것이었나? 만일 내가 마리의 의도대로 그 옷을 입었더라면, 사람들이 나를 어떤 시선으로 쳐다봤을지 너무도 분명한 것이었다. 아찔했다. 그 더러운 추문에 맞춘 완벽한 옷차림이었다. 내가 드레스를 입고 있을 때, 감탄하며 말하던 마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완벽해요!'


자기 남편 이름에 먹칠을 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래서 내게 벌을 주기 위해서 그런 거였나?

아니면 설마, 정말로 그 추문을 믿기라도 하는 것일까?

몇 주 동안 나와 함께 하며, 마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일까?

나에게 보여줬던 그 친절과 미소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렇다면 마리는 내가 이 농장에서 떠나 주길 바라기라도 하고 있는걸까?


어쩌면 이미 피터를 설득해 임명 취소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 사람들에게 아무런 발표가 없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매니저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것인가? 내가 원했던 자리도 아니다. 그저 애들과 밥만 먹고 살수있게 일자리만 주면 될텐데....고양이가 가지고 노는 쥐가 된 기분이었다.


나의 생각은 답을 내리지 못한 채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나는 건물 벽을 붙잡고 간신히 서서, 비틀거렸다. 그러다 지금 홀에 있는 아이들이 떠 올랐다. 아이들을 데리고 당장 여기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남편을 피해 도망쳤던 그 밤처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갈 곳은 없었다. 아이들 여권이라도 만들 수 있다면 한국으로라도 가겠는데, 아이들 아빠의 사인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내게 희망은 없었다. 갇혔다.


갈증이 났다. 그리고 들어가서 아이들을 챙겨 이 자리를 떠야겠단 생각을 했다.


홀의 모든 사람들은 벌써 취한 듯, 분위기는 뜨거웠다. 특히 농장 설비팀 팀원들과 딜란은 어디에서 미리 술을 마시고 온건지 만취상태였다. 딜란은 농장의 직원들, 특히 나이가 좀 든 여자 직원들에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껴안고 춤을 추듯 빙그르르 돌기도 하고, 장난스레 볼에 키스도 하며 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여자들과 그의 팀원들은 홀이 떠나갈 듯 웃어젖혔다. 아이들은 한쪽 구석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었다. 나는 물을 한 컵 마셨다. 폴은 피터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들 옆에 서 있던 마리는 여전히 나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평소와 너무도 상반된 차가운 마리의 행동을 보자 나는 확신했다, 더 이상 그 자리에서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한쪽 테이블에 앉아 내게 손을 흔들던 사라와 트레이시 그리고 스몬을 발견했다. 나는 그들에게라도 내가 사정이 있어 그만 가야 함을 알려야겠단 생각을 했다. 내가 홀을 가로질러 사라 쪽으로 몇 걸음 걷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거칠게 내 팔을 잡아당겼다. 딜란이었다. 그는 다른 여자들에게 하듯 나를 번쩍 들어 올렸고 나의 목에 키스를 하려 하였다. 그러나 나의 긴 머리와 두 팔까지 그의 팔 안에 갇혀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버둥거릴 뿐이었다. 내가 비명이라도 지른다면 파티는 망쳐질 것이다. 나는 바보처럼 파티를 걱정했다. 나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딜란의 팔 안에서 매달려 있었고, 내가 버둥거릴수록 딜란의 일행들과 여자들은 더 크게 웃으며 재미있어 했다.

" 당장 그녀를 풀어줘!"

폴이었다. 나는 폴이 분위기를 망치는 강한 어조의 말투로, 피터의 눈에 나면 어쩌지 하는 염려만 하고 있었다. 딜란은 폴의 한마디로 나를 풀어줬고 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웃음을 멈추었고 홀은 조용해졌다. 그때였다. 피터가 딜란의 셔츠를 잡고 그를 끌다시피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폴이 따라가고 있었다. 처움보는 피터의 표정과,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행동이었다. 나는 마리를 보았다. 그녀는 차가운 하얀 동상처럼 그렇게 서 있었고, 그녀 역시 여태껏 내가 보지 못했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멸이었다.


스테이시가 와서 나를 그들의 테이블로 데려갔다.

아이들도 그 장면을 본 것인지 내게로 다가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잠시 후 피터와 폴이 돌아왔다. 외부의 뜨겁던 날씨 탓이었는지 그들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고 조금은 상기된 표정이었다. 피터가 흐르던 캐럴을 멈추게 하였고 홀은 조용해졌다. 그는 마이크를 들었다.

" 잠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젠 괜찮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여러 의미로 특별한 날이에요. 우선 25년 동안 농장을 위해 수고해 준 사라가 은퇴를 하게 된 날입니다. 그녀에게 존경을 담아 감사를 드립니다"

사람들은 박수를 쳐 주었고 사라는 손을 흔들었다.

" 그리고 그다음으로 사라의 뒤를 이어, 일을 해줄 새로운 매니저를 소개하려 합니다.

민!... 일어나 주겠어요?"

나의 예상과는 달리 피터는 변함없이 나를 매니저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주저하며 앉아 있자 피터는 다시 한번 나를 호명했다. 사람들의 모든 시선은 내게로 몰려있었다. 나는 일어섰다.

" 대부분 아시겠지만 그래도 소개합니다. 새로운 매니저 민입니다. 그녀는 사라가 추천한 사람입니다. 역시 아시겠지만 그녀는 완벽하게 사라의 테스트에 통과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한, 지금 이 동네에 불미스러운 얘기가 돌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피터의 정면 돌파였다. 그리고 폴에게 묻는다.

" 폴 그런 적이 있나?"

폴은 팔짱을 끼고 어깨를 펴고 있었다. 그는 두 다리를 넓게 벌린 채 다소 큰 소리로 대답했다.

"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의 당당한 대답에 이어 피터가 다시 말을 잇는다.

" 나 또한 그런 일은 없습니다. 폴과 내가 그런 적이 없으니 민에게는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이겠지요.

민은 당당히 그녀의 힘으로 매니저 자리에 올랐습니다. 민을 아는 누구라도 나의 의견에 동의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부로 민은 매니저로서 일을 시작하는 겁니다. 그 첫 번째 임무로 딜란의 지속적인 농장 근무 여부를 민에게 맡깁니다. 민은 나중에 결정이 되면 내게 보고 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우리는 오늘, 그 나머지 일을 할 겁니다. 그건 즐겁게 이 파티를 즐기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환호의 박수를 쳐 줬고, 축축 쳐지던 Jim Reeves의 캐럴대신, 빠르고 경쾌한 캐럴이 홀 안에 울려 퍼졌다. 누구보다 신이 난 우리 아이들이 서로 두 손을 잡고 껑충껑충 뛰고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