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머 크리스마스 (상)

파란 방갈로의 노래 9

by 블루

그해 12월 여름은 유난히 뜨거웠다. 연일 45도가 넘는 날씨로 습기를 가진 모든 것을 말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비를 기다렸다. 농장에선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린다. 해마다 열리는 파티지만 올해는 사라의 은퇴식을 겸한 것이라 더욱 특별한 파티가 될 거라고 피터의 아내 마리가 언질을 준다. 마리는 아주 조용한 여자다. 쾌활하고 매너 좋은 피터가 외향적이라면, 마리는 빛 좋은 정원에 앉아, 조용히 독서를 즐기는 풍경이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는 그런 마리와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한 준비로 분주한 가운데 있었다. 매년 크리스마스 파티 준비는 사라와 메간의 담당이었지만, 올해는 사라의 은퇴와 메간의 애매한 입지로 마리가 내게 청한 것이었다. 파티는 농장의 "블레싱 홀"에서 열린다 한다. 블레싱 홀은 피터가 각종 파티와 연회 등, 상업적인 목적으로 농장 부지 위에 지어 놓은 새 건물이었다. 그리고 카운슬의 허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홀을 올해 처음 사용할 예정이었다. 리는 사라의 은퇴 파티와 홀의 광고에 쓰일 사진촬영을 그날 하기로 했다고도 한다. 그래서 마리는 이번 파티에 과감하게 경비를 쏟아 붓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마리가 원하는 색깔로, 마리가 원하는 모양으로, 마리가 원하는 자리에서 반짝여야 했다.

리와 두 시간이나 떨어진 도시로 쇼핑을 갔던 어느 날이었다. 마리는 파티에 뭘 입고 갈지를 내게 물었다. 사실 내게는 파티란 처음이었고, 파티에 입고 갈만한 옷은 당연히 없었다. 없다 했다.

" 내 그럴 줄 알았어요.."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드레스 숍으로 나를 데려갔다. 태어나서 처음 가본 드레스 숍이었다. 그곳엔 평소 호주 사람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화려한 색의 드레스들이 즐비했다. 그녀는 내게 검은색에 가깝던 붉은색의 짧은 드레스를 추천했다.


" 이게 민의 검은 머리색과 딱 어울릴 것 같은데 어때요?"

짧은 그 드레스는 끊어질 것만 같은 가는 줄로 되어있어서 어깨와 가슴이 거의 다 드러나 보일 것 같았다. 나는 펄쩍 뛰었다.

" 한번 입어나 봐요..."

나는 입어만 보라던 그녀의 말에 호기심 반으로 탈의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나 파티에는 절대 입고 갈 생각이 없었다. 거울에 비친 그 드레스를 입은 나는 아름다웠다. 내 평생에 한 번도 입어 보리란 생각을 못했던 그런 별처럼 반짝이던 드레스였다. 몇 겹으로 접혀 마치 튤립처럼 아기자기하게 귀여웠던 그 드레스를 입은 나를, 나는 탈의실 안에서 감상했다. 그 드레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예뻤다. 가슴이 훤히 들어 나지만 않았다면 어쩌면 입고 싶은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탈의실 문을 열고 마리에게 조차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드레스와는 전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탈의실에서 시간을 오래 지체하자 마리는 노크 후 문을 연다.

" 나 좀 들어가요.."

가슴을 가리고 호들짝 놀라는 나를 그녀는 재미있어하며 연신 감탄하는 척을 했다.

"이건 아니에요. 저는 이거 못 입어요.."

" 왜 그래요.. 이쁘기만 한데요.."

" 이건 가슴이 너무 보여서 안 되겠어요.."

그러자 그녀는 내 손을 치우며 잠시 내 가슴 쪽을 바라본다.

" 그럼 그것만 해결하면 되겠어요.."

그러면서 가슴 양쪽의 옷을 잡고 맞대어 붙여본다.

" 이 정도만 돼도 가슴이 덜 보이네요. 수선을 해 달라 할게요"

그러면서 그녀는 드레스와 같은, 붉은색의 굽이 높은 구두를 가져온다. 역시 반짝인다.

" 신어봐요"

그녀는 내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그건 명령에 가까웠다. 나는 할 수 없이 신었다. 그러자 나의 키는 더 켜져서 마리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어 보였다.

" 완벽해요...!"

마리는 마치 자신이 원하던 인형을 찾아 내기라도 한 듯 내 주위를 빙빙 돌며 신나 하고 있었다.

" 이번 파티는 사라의 은퇴식이기도 하지만 민을 사람들에게 정식으로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하니까 이걸 입도록 해요. 이건 나의 선물이에요"

그녀는 수선을 맡기고 돈을 지불했다. 나의 일주일치 주급보다도 많았던 그 돈이 나는 너무 아까웠다.

여러 번 그녀에게 간곡히 내 의사를 전했으나, 마리는 이미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 완벽한 하나의 장식품을 찾아낸 듯 만족해 하고있었다. 전혀 포기할 마음이 없는 사람처럼 완강했다.


드레스 가게를 나선 마리와 나는 카페에서 간단히 점심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음식을 주문 후 조심스러운 듯 말을 꺼냈다.

" 메간이 무슨 짓을 한지 아나요?"

갑자기 꺼낸 메간 이야기였다. 농장의 그 누구와도 일에 관련된 일 외에는 도통 대화가 없던 나였기에,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늘 궁금은 했었다.

" 메간이 민에 대해 좋지 못한 말을 하고 다녔다 하네요"

기분이 상했다. 메간이 나에 대해 좋은 감정이 아닐 거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니 뭐라고 했을지 궁금했다.

" 뭐라고 했는데요?"

마리는 주의를 의식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민이 폴을 유혹해서 많은 것을 얻어 낸다고 말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해요... 그리고...""

그녀는 다시 주의를 한 번 더 둘러봤다.

" 그리고 그 외에 남자에게서도요.."

나는 멍해졌다. 왜? 왜!!라는 의문이 가득했던 내 머릿속은 억울한 마음보다 우리 아이들이 먼저 떠 올랐다. 작디작은 이 시골에서 혹시나 아이들도 엄마에 대한 이 흉한 소문을 들었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폴도 당연히 들었을 것이다. 너무 미안했다.

" 나나 사라 그리고 농장의 누구라도 민이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믿지 않지만, 혹시라도 그 누군가는 믿을까 하고 우린 걱정하고 있어요"

그 외의 남자라니? 폴 외에 나와 연관 지을만한 남자가 또 있다는 말이었다.

" 그 외의 남자란 누굴 말하는 건지 들으셨나요?"

" 그건...."

마리는 말을 망설였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던 눈빛은 부드러움에서 고양이가 쥐를 바라보는 듯한 쏘임으로 변해 있었다. 그제야 나는 마리의 의중을 알 것 같았다. 마리의 남편이자 농장 주인인 피터가 떠 올랐다. 그리고 왜 메간이 농장을 떠나야만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메간이 단순히 나에 대한 루머를 퍼트렸다 해서 일을 그만두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루머에 피터를 끌어들인 게 메간의 실수였던 것이다. 그제야 나의 의문은 풀렸다. 메간이 나에 대해 나쁜 말을 해서가 아니라 폴과 피터에게 더러운 오명을 씌우고, 그들의 명성을 깍아 내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별로 일손이 필요 없어 보이던 폴의 산장에서 일하게 된 계기도, 그리고 매니저라는 직책에 임명된 파격인사도 메간에게는 그저 뒷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보였을수도 있겠다 싶었다. 마리는 믿지 않는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그렇지 못했다. 농장에서 별로 접점이 없던 자신의 남편과 나를 믿었겠지만, 여전히 그녀의 기분은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란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끝내는 못난 나의 자격지심이 튀어나와 버렸다. 농장을 떠나야 하는 건 어쩌면 메간이 아니라 나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나의 억울함을 밝혀야 하나 싶었다. 이 산골에 손에 쥔 것도 없이 들어와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던 나였다. 산골 사람들의 도움만으로 살아야 하는 나를, 그들은 애초에 반기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단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큰일이었다. 용기가 없어 농장을 그만 두지도 못하고, 겨우 자리 잡기 시작한 이 산골에서 떠나는 방법도 모르던 나였다.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커져만 가는 건 공포였고, 바닥이 보이지 않던 우울이었다.


파티 전 날까지 나는 블레싱 홀에서 밤늦게 마리의 조수가 되어 파티의 장식을 도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늘 멍해 있었고, 나의 머릿속은 언제 일을 그만둔다고 말을 해야 할지로 가득했다. 정작 말을 할 용기도 내겐 없으면서도 나는 그 생각을 떨쳐낼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편백 욕조에 들어가 울고만 싶었다. 하지만 이젠 거기도 갈 수 없다는 걸 안다.


크리스마스 파티 날이 되었다.

나는 마리에게서 전해받은, 반짝이는 빨간 튤립 드레스를 상자에서 꺼내 침대 위에 펼쳐 놓고 한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린 아이들은 빨리 파티에 가자며 신이 나 들떠있었다. 창문으로 비껴 들어오던 햇빛으로 그 드레스는 한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의 소문이 어떤지 알고 있는 이 상황에서, 입으면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던 저 드레스를 입고 나설 용기는 내게는 없었다.


농장에서 일을 시작하고 세번째 맞는 크리스마스였다. 하지만 나는 먼저 두 번의 크리스마스 파티에는 참석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파티의 분위기도, 드레스 코드도 잘 몰랐다. 마리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이 드레스를 입어야 할지, 아니면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일하겠다는 의미로 작업복을 입고 가도 될런지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에어컨이 없던 우리집은 45도의 날씨 덕에 녹을듯 달구워져 있었다. 차라리 이 날씨에 분뇨 냄새 가득한 마굿간을 치우는편이 지금의 이 고민보다는 훨씬 나을것 같았다. 그만 둔다 해도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이 파티는 끝까지 지켜 봐야 할것 같았다.

미리 가서 파티의 준비 현황을 보기로 하였기에 마음은 점점 급해졌다.

결정을 해야만 한다.


나는 정강이까지 내려오던 면 소재의 흰색 주름 스커트와, 빨간색 티셔츠를 입었다. 그리고 흰색의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이 옷은 언젠가 내가 구세군에서 운영하는 중고용품 가게에서 구입한 옷이었고, 내가 가지고 있던 옷 중, 유일하게 작업복이 아닌 옷이었다. 나는 나를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