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삐를 쥔 사람

파란 방갈로의 노래 11

by 블루

그해 여름의 뜨거움은 유난히 가실 줄 몰랐다. 피터가 내린 나의 첫 임무인 딜란의 지속적인 근무여부는 피터의 마음을 읽어야 했다. 딜란은 다소 거친 부분이 있기는 해도 일에 있어 그는 탁월했다. 농장의 어떤 문제도 그는 척척 해결해 낸다는 걸 난 잘 알고 있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시작한 농장생활로 그는 일찌감치 설비팀 팀장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었다. 피터는 사람들 앞에서 나의 입지를 알리고자 그 "임무"를 내게 내렸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피터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내겐 애초에 사람을 자를 만한 "칼" 따위는 갖고 있지 않다는 걸.. 내가 피터에게 딜란이 술에 취해 실수한 것이니 그냥 넘어가자고 말했을 때 피터는 '그럴 줄 알았어요 '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는 활짝 웃었다.


새해가 되어 1월이 되자 사라는 농장을 떠났다. 그녀가 떠나며 그녀는 책상 위에 빨간색 머그컵을 선물로 내게 남겼다. "Good luck"이라는 짧은 메모와 함께였다. 나는 그 컵을 사무실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매니저가 된 나의 일과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새로운 매니저라기 보다는 경력 있는 잡부에 가까웠다. 모든 걸 녹이던 그 여름에도 나는 시원한 사무실에 앉아 시간을 보내려 하던 꼼수는 더 이상 부릴 수가 없었다. 나는 늘 긴장하며, 농장을 쉴 새 없이 돌아다녔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지 하는 초조함으로 항상 불안해했다. 그러다 일이 보이면 적당한 사람을 찾아 일을 주는 것이 아닌, 내가 직접 해버리자라는 마음 때문에 내가 하던 일은 두세 배로 늘어났고, 일이 끝나 집으로 돌아 가면 나는 녹초가 되었다.

그리고 침대에 엎어져 늘 하던 혼잣말은

'나는 호랑이가 아니야..'였다.


그리고 결국, 나는 사라에게 전화를 했다. 힘이 들다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내게 사라는

" 내가 준 그 머그 컵을 아직도 쓰고 있지 않은가 보군"

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 내가 농장에 있을 때 어떻게 했었는지 잘 생각해 봐. 내가 민에게 어떻게 했었는지 잘 알고 있잖아? 아무리 일을 잘하는 인부라 해도, 피터가 그 연봉은 치르지 않을걸?"

이라며 말을 붙였다. 나는 선반 위에 놓인 그 머그 컵을 내려서 살펴보았다. 사라는 항상 차가 가득 담긴 머그컵을 들고 농장을 어슬렁거렸지만, 매니저로서의 임무를 완벽하게 해 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컵을 다시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미련한 사람이었다.


한 가지, 매니저가 되면서 좋았던 일은 방학을 맞은 아이들을 농장으로 데려와 시원한 사무실에서 잠깐이라도 더위를 피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에어컨이 가동된 그 사무실을 좋아했고, 조금이라도 밖의 온도가 내려가면 농장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던 일과 중 하나는 승마를 배우려고 오던 학생들의 수업을 지켜보던 것이었다. 나는 우리 아이들도 승마를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지만, 아직 나의 형편으로는 어림도 없었기에 모르는 척할 수 밖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이들이 말에 올라 타 마장을 돌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양손에 그 말들의 고삐를 쥐고 있는 사람은 승마 코치가 아닌 폴이었다. 말에 올라타고 있던 아이들은 나를 발견한 후, 말이 놀랠까 봐 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엄마 나 좀 봐' 라며 작게 말을 했지만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무척 흥분해하고 있었다.

말들 역시 농장의 승마용 말들이 아닌 폴이 가지고 있던 세 마리의 말들 중 두 마리였다. 큰 아이가 타던 말은 썬더였고 폴이 경기에 주로 타던 경기용 말이었다. 그리고 작은 아이가 타고 있던 말은 이브였다. 이브는 이미 경기에서는 은퇴했지만 아직도 검은 윤기가 흐르는 무척이나 영리한 말이었다. 두 마리 모두 폴의 숨소리까지도 읽는 말들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걱정스러웠다.

겁이 없던 여섯 살의 작은 아이는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는지, 자꾸만 폴에게 고삐를 놓으라며 채근 중이었다. 자기도 다른 승마 교육생들처럼 뛰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폴에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안 된다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폴은 웃으며 '괜찮아요' 하더니 고삐를 슬쩍 놓았다. 작은 아이는 기다렸단 듯 발로 이브를 가볍게 차며 고삐를 쳤다. 달리자고 신호를 준 것이다. 하지만 옆에 서 있던 폴의 신호로 이브는 계속해서 느긋하게 걷기만 할 뿐이었다. 이브는 폴의 말만 듣는 것이었다. 이브 또한 폴이 아닌 어린아이가 타고 있는 걸 아는 것처럼 걸음걸이가 무척이나 조심스럽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폴이 고삐를 놓았음에도 썬더와 이브는 그렇게 우리 아이들을 태우고 마장을 빙빙 돌고 있었고 나는 아이들과 말들 모두 기특해하며 바라보았다. 폴에게 감사했다.


그런데 어느 사이 폴이 내 곁에 다가왔고, 그의 손엔 헬멧이 들려 있었다.

" 민도 한번 타볼래요?"

처음에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사실 나는 말을 무척 무서워 했었다. 하지만 어느 동물보다 말들이 영리하다는 걸 알고 난 후, 그 두려움은 없어졌지만 승마를 할 정도까지 두려움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 아니요. 전 됐어요"

그러자 폴은 내 머리에 헬멧을 씌워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 옆 동네 닭농장 주인 누구는 닭고기를 못 먹는데요. 재밌죠?"

그건 말 농장에서 매니저로 일하는 내가 말을 못 탄다고 놀리는 거였다. 그는 내가 잠시 어쩌지 하며 생각하는 동안 아이들을 안아서 말에서 내리게 한 다음 마장옆 관람석에 가서 앉으라고 다정하게 말한 후 눈을 찡긋한다.

" 이젠 엄마 차례야"

그는 이브의 고삐를 잡아 내가 올라설 수 있게 발판 옆에 세운 후 내게 오라고 고갯짓을 했다. 나는 관람석에서 응원하듯 바라보던 아이들에게 겁내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이브 위에 올랐다. 폴은 내 다리에 맞게 양쪽 발걸이를 조절한 후, 자신도 썬더에 올라탔다. 이브의 매끄럽고 건강한 몸 위에서 내 양다리는 어색했고, 생각보다 높았던 말의 높이에 놀랐다. 이런 말을 타고 폴은 묘기와도 같은 폴로경기를 한다는 것에 새삼 대단하다 생각했다.

그는 내게 머리, 어깨, 발이. 일자로 되게 하라며 기본자세를 알려주고 다리에 너무 힘을 주지 말라고 말해 줬지만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심만 잡고 이브를 믿고 몸을 맡기라 했다. 그는 썬더에 올라탄 채 이브의 고삐를 쥐고 마장을 빙빙 돌았다. 몇 바퀴를 돌자 나도 요령이 생겨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폴의 말처럼 이브를 믿었고, 또 고삐를 쥐고 있던 폴을 믿었다.

" 이젠 좀 알 것 같아요? 어떻게 타는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말들을 세우고 이브의 고삐를 놓았다.

" 잘 봐요. 민! 이렇게 고삐를 잡고 살짝 쳐주면 가라는 신호예요. 그리고 고삐를 살짝 잡아당겨 주면 이브는 설 거예요. 어때요? 차 운전보다 쉽죠?"

나는 폴이 고삐를 놓자 너무 무서웠다. 어쩌면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면 화를 냈거나, 욕을 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고삐만 꽉 움켜쥔 채 폴을 노려만 보고 있었다. 그러자 폴은 썬더의 몸을 돌려 내게 다가왔다.


" 이브를 움직이게 하고, 가는 방향을 정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민 밖에 없어요. 두려워하지 마요. 이브가 가는 대로 앉아서 끌려갈 건지, 아니면 민이 가려는 곳으로 이브를 가게 할지는 민이 하기에 달려 있어요. 고삐를 치기만 하면 돼요. 두려워 말아요. 어차피 지금 우리는 말위에 올라앉아 있잖아요. 방향을 잡아요. 고삐를 잡아요. 두려워 말아요..."


나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왜 폴이 그렇게 말하는지를. 이브는 내가 두려워만 하던 세상이었다. 그 세상으로부터 겁을 내고, 도망치고, 피하려고만 하는 내게 폴은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부드러웠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빛이 나고 있었고, 강했다. 그리고 ' 민,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라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땀이 나도록 꽉 움켜쥐고 있던 고삐에서 힘을 풀고 나는 살짝 내려쳤다. 이브가 움직였다. 이브가 걸었다. 이브는 나의 신호에 따라 움직여 주었다. 나는 혼자 마장을 셀 수 없이 돌면서 이브에게 설 때와 갈 때를 명령했다. 그리고 나는 고삐를 이용해 이브를 발판 쪽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나 스스로 말에서 내려왔다. 챨라였지만 세상이 만만하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아이들과 폴은 박수를 쳐 주었다.

다음날 출근을 한 나는, 사라가 선물한 그 머그컵을 선반에서 내렸다.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비록 사라처럼 차가 담긴 컵을 들고 어슬렁 거리지는 않겠지만, 매니저다운 매니저로 일을 하겠다는 나의 각오였다.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