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방갈로의 노래 12
폴은 내게 말했었다.
"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말고삐를 주지 마세요. 목적지를 정하고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세요. 가끔 말이 버티고 말을 듣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고, 몸을 흔들어 당신을 떨어 트리려 할 때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고삐를 꼭 쥐고 두려워 마세요."
그의 이 말 한마디는 나의 심장에 타투처럼 남아있다. 그가 내게 했던 이 말을 나는 듣고 싶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기에 막연히 들어야 한다 생각했던 것 같다. 듣고 싶었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나는 여전히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확실한 계획은 없었지만, 예전처럼 피하거나, 숨으려 하지는 않았다.
농장 사람들은 내가 변했다고 했었다. 직원들에게 일을 부탁할 때도 나는 내가 아닌 매니저로서 일을 부탁했고, 어쩌다 있던 사소한 말씨름에서도 나는 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점점 나의 말을 듣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그들과 나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틀을 맞추고, 어울려지고 있었다. 그건 그들이 나를 인정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찾은, 나로부터 편해지는 방법이었다. 나는 고삐를 놓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쓰고 있었다.
매년 7월이 되어 시린 겨울이 찾아오면, 나는 무척 우울해 지곤 했었다. 겨울은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밤새 달려 이곳에 온 계절이었다. 그 날밤 내 몸에 각인되었던 그 차갑던 온도는, 해마다 돌아와 서럽던 그날을 떠 올리게 하였다.
그 해 겨울, 그런 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던 일이 생겼다. 그것은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폴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농장으로 와서 폴로게임을 하지도 않았고, 마을 어디에서도 그를 볼 수가 없었다. 그냥 쉽게 트레이시에게 물으면 되었을 텐데 나는 그러지도 못했다. 폴에 대한 나의 관심을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일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나는 왠지 그 추문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폴을 모르던 사람들처럼 그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그가 사라진 것이었다.
나는 시간을 내서 방갈로를 찾았다. 키오스크는 잠겨 있었고, 스몬도 폴도 없었다. 폴의 방갈로도 들여다봤지만 모든 것은 잠겨 있었고,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처럼 거칠어져 있었다. 나는 잠시 파란 방갈로 포치에 앉아 있었다. 폴을 기다린 것이 맞았다. 하지만 나는 나 스스로를 속이며, 잠시 쉬었다 가는 것뿐이다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그날, 짧은 겨울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갈 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 언제든 오세요. 나는 여기에 있을게요'
그는 거짓말을 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 세상에 없었던, 폴이라는 환상을 내가 만들어 냈던 것은 아닌지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가 더욱 보고 싶어졌다.
그와 스몬이 사라지고 한 달쯤 되었을 때, 나는 마을의 작은 갈림길에서 폴의 트럭을 보았다. 분명 폴의 트럭이었다. 내 차는 정지해 있었고 폴의 트럭은 내 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었다. 그의 차를 보자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동안 나도 모르던 내 마음이었다. 나는 20여분 떨어진 슈퍼마켓으로 갔다. 그리고 가장 예쁘고 싱싱해 보이던 꽃다발을 샀다. 그가 무슨 꽃이냐고 물으면 '집으로 돌아온 환영의 의미예요'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는 예전 그가 나에게 꽃다발을 주면서 했던 거짓말이 떠 올라 웃음이 나왔다. 나는 고삐를 꽉 움켜쥐었고,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방갈로로 향했다.
키오스크에 들어서니 스몬이 있었다. 스몬은 나를 보자 흠칫 놀란 표정이었고, 피곤해 보였다.
" 차를 봤어요. 그래서 따라와 봤어요"
처음으로 나는 솔직했다.
그러자 스몬은 어색한 듯 웃으며, 인사를 했다.
" 어쩌죠. 오랫동안 비워둬서 엉망이네요. 차라도 들겠어요?"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당황한 듯 보였으나, 워낙에 깔끔한 그녀여서 먼지가 쌓인 키오스크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 아니에요. 폴에게 잠깐 할 말이 있어요. 그는 어디에 있나요?"
나는 그를 정말로 빨리 보고 싶었었다. 내 눈앞에 서 있는 그를 보고 싶었고, 그가 환상이 아닌 진짜 사람임을 확인하고 싶었었다.
" 그는 잠시 필요한 것이 있어 그의 방갈로에 있어요. 올라가 보겠어요?"
나는 그를 파란 방갈로에서 보고 싶었다.
" 아뇨 제가 파란 방갈로 포치에 있을게요. 폴이 내려오면 알려 주시겠어요?"
스몬은 알겠다 대답을 하며, 내가 들고 있던 꽃다발을 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내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 보였다.
오랜 시간 참아온 긴 숨을 내쉴 때인가? 숨이 모자라서일까? 더 이상 숨을 참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갑자기 생긴 것일까? 산속의 어느 한 구석에 굳게 박혀 있는 커다란 돌바위를 흉내 내며. 돌이 되리라. 나는 바위다. 라던 내가 편백나무 욕조의 흐물 하고 따뜻한 습기로 드디어 말랑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숨을 쉬는 방법도 배우고. 오늘. 방갈로 포치 끝에 간단히 남아있던 한 뼘의 햇살 위에 용케 골라 앉아 흥얼거린다. 산 아래 키 큰 유칼립투스 나무 가지들에 가려, 겨우 통나무 지붕 한쪽만 보이는 키오스크 현관 종소리가 귓속말하듯 어렴풋이 들린다. 귓속이 간지럽다. 머지않아 폴의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릴 것이다. 나는 미리 입가에 미소를 보였지만 그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언젠가 나의 미소 한 번에 백 만불이라도 치르겠다던 폴은, 지금 그렇게 바라던 내 미소를 놓쳤고 나는 백만 불을 잃었다. 폴이 방갈로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흥얼거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폴은 키오스크의 현관 방울이 한참 전에 울렸음에도 파란 방갈로에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산속으로 접어드는 계단 위에 그렇게 한참을 서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스몬에게서 내가 꽃다발을 들고 왔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예전의 나처럼 겁을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꽃을 들고 온 걸 후회했다. 너무 성급했단 생각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갑자기 그의 트럭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의 차는 뭔가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산길을 타고 있었다. 나를 피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또 한 번 생각 없이 행동했던 나의 못남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나는 서둘러 방갈로에서 내려와 나의 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었다. 스몬이 급하게 키오스크 문을 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지만, 나는 수치스러운 마음으로 스몬조차 볼 용기가 없었다. 그녀를 못 본체 하며 그대로 차를 몰았다.
다시는 사람 흉내 따위는 내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여전히 바위로 살아야 했다. 나는 차가 산기슭 중간길에 접어들자 유리를 내리고 조수석에 놓여있던 그 유치 찬란한 꽃다발을 허공으로 던져버렸다. 꽃다발은 크게 포물선을 그리고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산속 깊은 곳에 떨어져 빨리 썩어 버렸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나는 폴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친절함을 이용하고 그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 가려했던 나의 치사함에 화가 났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위험하리만치 산길을 빠르게 달렸다. 빨리 그 산속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다 나는 숲 속 높은 곳에 세워져 있던 그의 차를 보았다. 그는 다른 길로 빠져 숨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의 행동에 나는 기어이 그에게도 화가 나버렸다.
이럴 거면서 왜!
그의 다정함은, 나를 좋아해서가 아닌 지성인으로서 마땅히 가지고 있는 인류애였던것 뿐이다.
그는 내 앞에서 용감한 척했지만 사실 그는 나보다도 더 겁쟁이였던 것이다.
나는 그가 보라는 듯 거칠게 차를 몰았고, 그에게서 되도록이면 빨리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를 보지 않겠다 다짐했다.
결코 다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