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변명을 먼저 해 둔다. '쇼아(1985)'는 9시간짜리 다큐멘터리다. 거의 1년간에 걸쳐서 봤기 때문에 글을 쓰면서 내가 잘못된 기억을 하고 있을 수 있음을 변명해둔다. 하지만 어쩌면 이 다큐멘터리는 기억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세세하게 그 말들을 다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이 9시간의 대장정을 달린 끝에 깨달아야 하는 것은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신념 하나 뿐이지 않을까. 아, 쇼아가 무슨 내용이냐고? 쇼아는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를 지칭하는 말이다. 우리는 홀로코스트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 그것은 제사, 혹은 번제라는 뜻으로 피해 당사자들이 듣기에는 '내가 왜 제물이었는데? 이건 무엇을 위한 제사였는데?'라는 불쾌한 의문을 품게하는 단어다. 물론 조르조 아감벤의 주장에 의하면 그 뭐라 지칭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들은 일말의 제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왕을 위한, 권력을 위한 제사다. 하지만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물? 내가 왜? 난 살고 싶어! 너나 여기 올라가서 칼 맞고 죽어라!"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건들을 쇼아라고 부른다. 그건 히브리어로 '절멸'이라는 뜻이다. 절멸.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 단어는 그 일련의 사건들을 참 잘 설명하는 단어라고.
이걸 보다 보니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어떤 민족이나 어떤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저렇게나 공을 들이고 품을 들여서 다 없애버리려고 하는 그 노력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도대체 얼마나 싫어해야 저렇게 많은 자본과 자원을 들여서 사람을 효율적으로 없애는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나라면 싫어하다가도 그 많은 수백만의 사람들을 다 없애기에는 너무 큰 계획과 돈, 자본과 노력이 들어서 포기하고 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실 이 다큐멘터리에는 히틀러가 나오지는 않는다. 히틀러의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그건 꽤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히틀러는 이 일련의 사건들에 있어서 일종의 표상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히틀러 혼자서 벌인 일이 아니고 무수히 많은 인력이 동원된 일종의 산업과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 벌어져버린 일들에 대해서 누구를 탓해야 한단 말인가? 포로들을 채찍질하며 기차에 싣고 나른 사람? 아니면 그 기차의 시간표를 조정하고 담당했던 사람? 수용소에 포로들이 내렸을 때 아픈 사람들의 목에 '약 한 방'으로 천국으로 안내해준 사람? 아니면 그들의 옷을 벗기고 머리를 깎고 처형실로 몰아넣었던 사람? 처형실에 가스 대여섯 통을 주입한 사람? 처형실에서 현무암 덩어리처럼 녹아 있는 시체들을 바위덩이 꺼내듯이 꺼내어 오븐에 넣고 구운 사람? 누굴까? 손가락질 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 모든 사건에 대하여 누군가를 탓하면 된다고 그 누군가를 명확히 지시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히틀러인 것이다. 하지만 사실 히틀러는 '만들어진 시대정신의 표상'이라고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까, 가짜 인물이라고 해도 놀랍지 않다. 히틀러가 없었다면 다른 누군가가 히틀러의 자리를 대신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들은 오직 히틀러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죽은 사람들도 자신들을 혐오하는 사회, 그리고 그 혐오 때문에 죽어간다고 생각했지 히틀러라는 딱 한 사람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치 내가 성소수자이자 아시안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힘든게 사회와 사회의 혐오 때문이지 누군가 딱 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다큐멘터리는 혐오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혐오에 얼마나 경제적인 자본이 많이 들어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자본이 들어가는 곳에서는 인간이 소외된다. 자본이 많이 들어가면 많이 들어갈수록 그렇다. 그것이 산업으로 변해갈수록, 산업이 거대해질수록, 그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부품으로 일하는 인간은 전체 결과물, 즉 '쇼아'라는 결과물에서 소외된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자신은 그저 맡은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라고 칸트의 철학을 내세워 말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수용소에서 자신의 업무만을 보며 조각난 부품처럼 일을 했던 한 실무 책임자는 서류처리만 하면 되었고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이지는 않았다. 즉 그는 '쇼아'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그 누구도 '쇼아'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가질 수 없었다. 너무나 거대한 산업이었기 때문이다. 히틀러 본인조차도 산업으로 치자면 사장, 공장주에 해당함에도 '쇼아'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출신 포로가 똑같은 우크라이나에서 온 포로들을 채찍질하며 트럭으로 빨리 옮겨타게 만들었을 때의 심경을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 출신 포로가 처형실에 들어가기 직전의 자신의 이웃들의 머리를 깎아주며 느꼈을 심경도, 처형실에서 아수라장이 된 으깨진 시신들도 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우리 그 소외된 시각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를 찬찬히 세세하게 다 들여다보자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다큐멘터리의 상영시간인 9시간은 긴 게 아니라 오히려 짧다. 이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찬찬히 세세하게 다 들여다보기에 9시간은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다. 오직 증언만으로 그 사건을 완벽히 재구성해보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들까. 90시간, 900시간, 9000시간이라도 부족할 것이다. 왜냐하면 증언들도 다 파편화 되어있기 때문이다. 마치 발터 벤야민의 언어에 대한 설명처럼, 모든 것은 신의 언어에서 벗어나 있고 누군가의 언어 속에는 그것의 알멩이가 파편화 된 채로 조각조각나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조각들을 다 꺼내어 맞춰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이 사건은 한 명의 단 하나의 진술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해되고 해결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신의 언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기에 신의 언어의 일부만을 와해된 언어 속에서 말할 수 있고, 그 와해된 언어 속에서 우리는 진실을 파헤쳐내어 구슬을 꿰뚫듯이 꿰뚫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 그제야 우리는 소외된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다큐는 그 인간의 언어를 다루는 과정에 있어서 통역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진실의 파편을 담고 있는 와해된 언어는 기득권층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울퉁불퉁하고, 돌발적이고, 가공되어 있지 않으며, 날것의 언어이다. 우리는 그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통역을 해야 한다. 단순히 이해의 차원에서 통역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차원에서도 통역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소수자의 언어란 언어 또한 소수성을 띄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공용어인 영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지방의 언어로 말을 한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폴란드어... 하지만 우리가 이 모든 언어를 배울 수는 없다. 그래서 통역이 필요한 것이다. 이 다큐를 보면서 제일 처음 느꼈던 특이한 점은 대상자가 말을 할 때 자막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통역사가 통역해줄 때에 그것에 대하여 자막을 붙인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화자의 말을 직접 듣는 것이 아니라 통역사의 말을 통해서 듣게 된다. 한 번 걸러진 말인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고 말한 가야트리 스피박의 말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따르고 있지 않다. 서발턴이란 사회적 약자, 소수자를 뜻하는 것으로 스피박은 언어란 기득권층의 용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자신의 상황을 나타낼 용어가 없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카스트제도의 최하층에 위치하고 남편이 죽으면 따라 장작불 위에 올라가서 타죽어야 하는 여성의 삶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말을 쓸 수 있을 것인가? 그 여성의 '비탄' 또는 '슬픔', '좌절'이라는 말이 기득권층이 느끼는 '비탄', '슬픔', '좌절'과 같을 것인가? 쇼아의 희생자들의 언어도 같다. 이들의 언어는 세계 공용어인 영어가 아니다. 이들의 경험을 묘사하는 언어 또한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통역을 통하여 들을 수 있다. 간신히 이해를 해보려고 노력해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서발턴은 말할 수 없으나 그들의 말을 경청할 방법을 우리는 찾아낼 수 있다.
결국 이 영화는 통역의 말에만 자막을 붙임으로서 우리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지 잘 학습시키고 있다. 한비야가 다섯 명의 통역을 거쳐서 아프리카 원주민과 대화를 했다는 일화를 기억한다. 우리는 그렇게라도 소수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언어가 사라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어떠한 인류애를 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여기 통역을 다르게 쓰는 영화가 있다. 더 정확히는, 언어의 소수성을 다르게 접근하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 정권의 학살을 다룬 영화로, 주인공은 미국인과 영어를 사용하는 캄보디아 기자이며 둘의 대화는 영어로 진행된다. 그러다가 중간에 미국인은 미국으로 돌아가버리고, 어쩌다보니 캄보디아에 남겨진 다른 주인공은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 학살 속에서 살아남으면서 자신의 친구인 미국인에게 시시때때로 독백을 건넨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영어로 하는 독백과 대사에는 모두 자막 처리가 되어 있지만, 현지에서 벌어지는 학살에 대한 언어, 캄보디아어에는 자막이 붙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감독은 왜 이렇게 처리를 했을까? 이 영화의 언어는 둘로 나뉜다. 하나는 이성적인 인권의 언어, 영어이고 다른 하나는 비이성적인 학살의 언어, 캄보디아어이다. 전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후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 또, 전자는 기득권을 가진 언어이고 후자는 언어적 소수성을 가진 언어이다. 그러다보니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절로 생각하게 된다. 영어를 쓰는 문화권은 인권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저 언어를 쓰는 문화권은 비인권적이라고.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갈라치기에 불과하다. 그것은 영화 마지막에 이매진을 배경으로 미국인 주인공과 캄보디아인 주인공이 껴안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그 때의 대사는 이렇다. 미국인이 "날 용서해줘"라고 말하면, 캄보디아인 주인공이 "용서할 것도 없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미국인은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 사건을 초래한 데에 크나큰 원인 제공을 했다. 그러니 이것은 서양인 감독의 환상에 불과한 장면인 것이다. 마치 이 영화의 전체에서 등장하는 불합리한 언어의 사용처럼.
둘 다 학살사건과 사회의 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영화를 만들었지만,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이토록 결과가 달라지고 전하는 메시지가 달라진다. 전자는 소수자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들었다면 후자는 소수자의 언어를 완전히 배제한다. 문득 여기서 봉준호 감독의 2019년 아카데미 수상식 소감이 떠오른다. 자막의 장벽을 넘는다면 우리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것은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통역의 장벽을 넘는다면 우리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서발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또 하나의 장벽을 넘고, 또 하나의 발전을 이룩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