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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산드라 Dec 30. 2021

이유없는 반항

* 스포일러 있습니다.

이유없는 반항(1955)

나는 제임스 딘을 스크린이 아니라 20세기 보도사진집에서 처음 보았다. 거기에 제임스 딘의 한 마디 인용구는 이렇게 나와있었다. "서둘러서 살고 젊을 때 죽어야 해. 그래야 시체라도 보기 좋을 테지." '이유없는 반항'에 나오는 제임스 딘의 대사. 나중에 '이유없는 반항'을 보았을 때 이 대사를 오매불망 기다렸음에도 나오지 않아서 대체 이 대사는 어디에서 가져온 것인지 미심쩍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간지가 나서. 젊음의 간지란 이런 것일까? 우울장애를 가진 정신질환 환자로서 서둘러서 살고 젊을 때 죽어야 한다는 말에 감명을 받으며 자라난 10대 청소년은 이제 10대보다는 30대에 더 가까운 나이가 되었고,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말에 감명을 받는 어른이 되었다. 


'이유없는 반항'의 첫 장면은 경찰서에 각각의 이유로 끌려와 청소년 전담 형사를 만나고 있는 비행청소년들의 모습이다. 어른들은 10년이 지나면 이 모든 것이 우스워보이고 얼마나 하찮아 보일 것인지에 대해 말하지만, 그 말들은 오히려 아이들에게 있어서 지금 현재의 일이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지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의 행동은 어른들의 시선에 있어서 '반항'이다. 심리학적으로 아이가 어른 같은 행동을 하는 설늙은이가 되었다면, 그것은 어쩌면 잘못 발달해가고 있다는 지표 중 하나다. 아이는 어른이 아니고, 어른의 잣대를 아이에게 들이밀 수 없다. 5세 아이가 아끼는 장난감을 잃어버린 슬픔은 40대 어른이 실직한 슬픔과 동일하다. 아무도 5세 아이에게 네가 장난감을 잃어버린 일이 20년 후에 엄청나게 하찮아 보일 것이기 때문에 울고 화내지 말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아이나 청소년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지각하는지 모르기때문에 하는 소리다. 아이가 자신의 삶을 오롯이 살아가기로 한 것이 '반항'이라면, 아이는 마땅히 '반항'해야 한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 '400번의 구타'에서도 아이는 반항한다. 소년원의 담장을 넘어 저 멀리, 저 멀리 자유로운 바닷가로... 아이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장소는 군대식 학교가 아니라, 어쩌면 탁 트인 바닷가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반항하지 말라'는 틀에 갇혀 오늘도 집에서, 학교에서, 혹은 다른 어딘가에서 숨을 죽이고 살고 있던가. 이 모든 일이 10년 후면 우습게 보이리라는 와닿지 않는 위로와 함께. 그러나 서른이 되면 잔치는 끝나고 젊음과 청춘도 끝이 난다. 10년 후에 그 일이 하찮게 보이는 이유는, 조그만 것 하나에도 생생하게 삶을 경험했던 시기가 끝이 났기 때문이다.


'이유없는 반항'의 마지막 장면에서 위험에 빠진 아이를 구해오는 것은 같은 청춘을 살고 있어서 그 삶의 맥동과 의미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같은 아이이지, 비행청소년 담당 경찰관들을 잔뜩 끌고온 어른들이 아니다. 그들은 도와야 하는 위험에 빠진 아이를 결국은 죽이고야 마는데, 이 장면은 마치 몇십년 후에 만들어질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도 한다. 어떤 약자는 위험해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약자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공격성을,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는 공격성을 가지고 있을 때 그렇다. 정신분석가 위니콧은 아이가 가혹한 공격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양육자가 그 공격성을 견뎌낼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좋은 양육자는 공격성을 억압하고 거세하는 양육자가 아니라, 그 공격성을 잘 견뎌내어서 아이가 양육자로부터 떨어져 현실을 인식하는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게 하는 양육자다. 영화에서 총을 든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버리고 갔고, 그러므로 사무치는 외로움과 애정갈구 속에서 양육자가 자신을 바라보도록 원하는 무의식적 욕구, 자신도 어찌할 줄 모르는 상황에 몰려서 터져나오는 사무치는 불안과 분노를 가지고 있다. 생각해보라, 그것을 견뎌내고 품에 안아주었을 때에 아이가 총을 내려놓겠는가, 혹은 똑같이 총구를 들이밀며 내려놓으라고 혼내고 협박했을 때에 총을 내려놓겠는가? 후자의 경우에 총을 든 아이가 택할 길은 결국 하나 뿐이다. '델마와 루이스'의 결말처럼 허공으로 달아나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감독인 니콜라스 레이는 늘 아웃사이더의 삶을 다루었다. 사회가 요구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다른 삶을 사는 외로운 개인의 내적 고통에 늘 관심을 가지고 있던 니콜라스 레이가 청춘을 다룬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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