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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산드라 Dec 30. 2021

크리스티나 여왕(퀸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나 여왕(1933)

영화들을 보고 있다가 예상치도 못하게 여성이 주연으로, 그것도 당차게 나오는 영화를 보면 반갑기 마련이다. '크리스티나 여왕'이 그렇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실제 존재하던 스웨덴의 여왕으로 1632년부터 1654년까지 왕좌에 올랐으며, 사람들은 그를 여왕이라고 불렀지만 그의 공식적인 직함은 '왕'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이 글에서 나는 크리스티나 여왕이 아닌 크리스티나 왕이라고 부르겠다. 크리스티나 왕은 6세의 나이에 섭정 자리에 올랐는데, 놀라운 것은 그 당시에 왕의 자리에 오른 여자로서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8세에 자진퇴위를 한 것은 어쩌면 꾸준하게 제기되던 결혼에 대한 압박 때문일 수도 있겠다. 크리스티나 왕은 르네 데카르트와 토론을 했을 정도로 굉장한 학문적 소양을 가지고 있었고, 그 학문적 예술적 소양은 계속해서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의 예술과 학문에 대한 관심은 낭비벽으로 치부되기 일쑤였고, 결국 크리스티나 왕은 스페인과 동맹을 체결한 후 28세의 나이에 자진 퇴위를 하고 도나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남장을 하고서 떠나갔다. 이 영화는 크리스티나 왕이 어쩌다가 갑자기 스페인과 동맹을 체결하고 퇴위를 하고서 스웨덴을 떠나갔을까, 에 대한 이야기를 상상력을 곁들여서 풀어내고 있다. 바로 결혼을 하라는 압박에 시달리던 크리스티나 왕이 잠행을 나왔다가 스페인 대사를 만나고 서로 사랑에 빠진 뒤, 왕위를 내려놓고 떠나갔다는 것이다. 이 줄거리만 들으면 사랑에 약한 여자 클리셰에 묶인 채 여성을 납작하게 소비하는 것만 같아서 크리스티나 왕에 대한 모독이라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영화를 잘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사랑에 빠진 여왕 이야기보다 더 좋은 서사를 만들어낼 수도 있었겠지만, 1933년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감안했을 때, 신하의 손을 내치고 스스로 왕좌에 올라가 앉아서 당당히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6세 여왕의 모습을 스크린에 담아내었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 그 장면 하나로 그치지 않고, 이 영화는 계속해서 크리스티나 왕의 주체적이고 권위적인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또한 나는 여성이 반드시 사랑을 도외시한 채 일에만 매달리는 커리어 우먼일 때에야 페미니즘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에, 신하들이 압박하는 결혼이 아니라 자신이 택한 사랑을 하는 이 영화의 크리스티나 왕도 충분히 페미니즘적이라고 생각한다.

크리스티나 여왕(1933)

이 영화의 재미있는 점은 아마 전설적인 배우, 그레타 가르보가 계속해서 남장을 하고 말을 하며 등장한다는 것일 테다. 롤랑 바르트는 유성영화 시대의 개성, 오드리 햅번과 대비하여 무성영화 시대의 미(美)로 그레타 가르보를 내세운 적이 있다. 그레타 구스타프손, 스톡홀름 환경미화원의 딸, 그레타 가르보는 쾌활한 10대 역할, 우아한 에로티시즘의 이미지를 거쳐 헐리우드 미국 영화가 일찍이 본 적 없는 절망, 탐욕, 성숙한 섹슈얼리티의 경계를 표현해냈다. 그레타 가르보의 거의 모든 헐리우드 영화를 촬영한 촬영 기사 윌리엄 대니얼스는 그레타 가르보만을 위하여 섬세하고 낭만적인, 표현력이 풍부한 간색(half tones) 조명을 고안해냈다.


크리스티나 여왕(1933)

무성영화의 은막의 시대가 지나가고 유럽 악센트를 쓰는 배우들이 유성영화의 도입과 함께 몰락해갈 때, 그레타 가르보는 그의 이국적이고 음악적인, 깊고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살아남았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그의 유성영화들 중 하나이고, 이 영화를 보면 그가 얼마나 깊은 목소리를 가졌는지 알게 된다. 그러나 그레타 가르보를 가장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미스터리한 눈빛, 그 눈빛을 보면 느껴지는 냉정함과 내적 고통의 감각일 것이다. 그레타 가르보는 웃지 않는다. MGM이 그레타 가르보를 웃게 만들었을 때, 그 영화는 그레타 가르보 최악의 영화가 되었다.


크리스티나 여왕(1933)

예나 지금이나 스크린에서 강렬한 여성 주연을 만난다는 것은 반갑다. 얼마 전에 본 카자흐스탄 영화, '토미리스: 전쟁의 여신'에서 예상치도 못하게 페르시아에게서 승리를 거둔 유목민족의 여성 부족장을 만났을 때에도 그런 기분을 느꼈다. 게다가 그 여성 주연이 전설적인 배우의 작품이라면 두말해 무엇하랴. 그런 점에서 크리스티나 여왕은 한 번 쯤 볼만한 영화다. '그' 그레타 가르보의 영화가 아닌가? 1933년 영화에서 여성 지도자를 만나보고, 또 예상치도 못한 퀴어코드도 조금쯤은 맛보고 싶다면. 고전 영화들, 비-주류권 영화들은 이런 예상치 못한 작품들을 발견하는 재미에서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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