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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강산 Oct 31. 2024

남편이 내게 준 선물

내 나이 2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2년 뒤 결혼을 했다. 첫 아이는 딸, 둘째는 아들이 낳았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한 것은 두 아이를 낳아 사회에 환원했다는 것이다. 칭찬한다.


남편은 간이 좋지 않아 지속적인 검진을 받으며 살아왔다. 지방간에서 간경화로 간경화에서 간암까지 진행되었다. 정기검진을 하다가 2008년 암 선고를 받았고 그 상태에서 암세포가 머리를 내밀 때마다 색전술을 무려 19차례나 했다. 색전술로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태까지 갔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담당교수님께서 병원을 떠나셨다. 이 참에 간이식을 받고자 병원을 옮겼다. 


2008년 암선고를 받던 날. 나는 잊지 못한다.

병원 정기검진을 혼자 다녀와서 시무룩하던 남편이 나에게 슬쩍 담당교수님이 하신 말씀이라며 

"간 이식을 받을 수 있으면 받으라네"

나는 째려봤다. 내 눈에서 레이저가 발사되었다.


간이 좋지 않아 술을 자제하라는 내 말을 전혀 듣지 않던 남편이었다. 집에서는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 술을 밖에서는 멈추질 못했다. 1차는 식사, 2차는 입가심, 3차는 노래방, 4차는 한잔 더, 5차는 아무 데나 이런 식이었다. 밤을 지새워 술을 드셨고, 아침에 귀가하는 날이 점점 늘어만 갔다. 내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 만무했고 매일매일 만나기만 하면 내 목소리가 문턱을 넘다 들었다. 이러다가 2008년 암 선고를 받은 것이다.


더 미운 것은 아들이 당시 중학생이었는데

"담당교수가 그러는데 자식의 간이 제일 좋데"

"기왕이면 빨리 하는 게 좋고, 그게 안되면 중국이라도 가서 받으래. 1억 정도 든다네"

미웠다. 


1억이 문제가 아니라 이쁘면 집을 팔아서라도 해 줄 수 있다. 그런데 매일 술 드시고, 경제적 활동은 하지 않으시고, 모든 살림은 내게 맡기고....

그런데 뭐 내 금쪽같은 아들의 배를 가르라고?

남편을 죽이고 싶었다.



그 시간부터 나는 남편과 일절 말을 나누지 않았다. 혼자 중국을 가든 말든 나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미웠다. 아빠라는 사람이 몸관리는 제대로 하지 않고, 오히려 망가뜨리고, 어리디 어린 아들의 간을 달라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내 아들은 절대 건드리지 못해"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나는 내 살길을 찾아야 했다. 남편이 언젠가는 나보다 먼저 갈 것을 알았기에 애들과 나를 지키기 위해 미래를 준비해야 했다. 그래서 공인중개사 공부를 시작했다. 2년을 꼬박 공부하고 2013년에 개업을 하였다. 지금까지 하고 있는 일이다.


2013년 내가 개업을 했는데 남편은 본인의 사무실인양 좋아했다. 일찍 나가 청소도 해주고, 늦게까지 사무실을 지켜주는 등 나에 대한 많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사람이 좀 되는가 보다 싶었다. 그러나 술을 좋아하는 그 형국은 변하지 않았다. 계약을 하면 좋다고 한잔, 잔금을 하면 돈 벌었다고 한잔, 누군가 찾아오면 기뻐서 한잔, 기념일은 기념일이라 한잔, 비 오면 비 와서 한잔, 도대체 매일매일이 술판이었다. 정말 지겨웠다.


몸이 아파 직장을 다닐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업을 했고, 부동산에 관한 일을 했다. 출퇴근 시간도 없었고, 피곤하면 쉬고, 컨디션 좋으면 나오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시간을 흘러 아들이 수능을 마쳤고, 딸은 대학 졸업반이었다. 애들이 의견을 정해 아빠에게 간을 주겠다고 검사를 받기로 한 것이다. 나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내 자식이 죽을지도 모를 일을 내 돈 주고 해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딸과 아들의 의견은 단호했다. 검사받고 결정해도 되니 일단 검사를 받겠다고 말이다. 그래야 후회가 없다고 한다. 정말 어찌해야 할지 매일매일 그렇게 눈물이 나올 수 있을까?


검사는 둘이 했고, 아들이 적격판단을 받았다. 아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정말 미안했다. 남편의 검사는 한 달 뒤였다. 내 아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내가 죽고 싶었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매일매일 반복했다. 아들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정말 죽는다면 친구도 못 볼 것이고 이제 대학 가서 누릴 그 행복도 누리지 못할 것 같아 내 속이 속이 아니었다. 아들의 친구가 미국에 있다. 그 친구도 만나보고 미국 여행도 한번 더 하고 오라고 미국으로 한 달간 보냈다. 내가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아들이 출국하는 날까지 나는 정말 어찌 살았는지 모른다. 미국 가서 안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한국의 상황에 따라 아들을 그냥 미국에 두려고도 했다. 


2016년 11월 남편은 검사를 했고 결과를 보러 간 날, 죽을 날을 받고 말았다. 6개월!

간암이 뼈로 전이가 되어 간이식이 불가하단다. 아들이 준다 해도 이젠 받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뼈로 전이된 암 치료를 위해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워낙 환자가 많아 새벽 1시에 받아야 했다. 이때부터 나는 운전사, 아내, 간병인, 가장의 역할을 한 번에 다 해내야 했다.


집이 답답하다고 하여 바로 경기도 서종에 방 하나를 구했다. 집에서 40분 거리라 남편은 서종에서 휴양을 하고 나는 서종에서 출퇴근을 했다. 그렇게 한 달여 시간이 지난 어느 날, 가족여행으로 제주도를 가자고 한다. 마침 1월에 남편 생일도 있어서 강행했다. 제주도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남편의 사촌누나 부부를 만난 것이다. 그 부부도 몸이 좋지 않아 요양할 겸 제주도에 오셨다고 한다. 남편의 상황을 알고선 제주도에 그냥 있으라고 권하신다. 그래서 집에 올라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와 남편은 다시 제주도로 내려갔다.


사촌누나 부부가 있어 외롭지 않은 제주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침 운동, 해수 사우나, 비자림 산책, 점심, 오후는 동네 산책, 제주 여기저기 관광 등으로 보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서울에 와서 일을 체크하고 내려가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2월에 내려가 5월이 되었다. 날씨도 많이 따뜻해졌고, 바닷바람도 차지 않았다. 소화가 안된다 하여 매일 아침 죽을 끓이는데 몇 술 뜨지도 않고 못 먹겠다고 손사래를 친다. 거둬들이고 속상했다. 비자림 산책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시누가 남편에게 암에 좋은 음식에 대한 내용이 담긴 링크를 보내왔다. 그 내용 중에 개고기가 있었다. 남편은 개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한다. 평소 먹지도 않던 사람이 꼭 먹고 싶다고 한다. 그걸 먹으면 기운이 날 것 같다고 말이다. 환자에게 개고기는 좋은 단백질이라고 한다. 기가 막혔다. 죽도 소화시키지 못하면서 무슨 개고기를 먹겠다고. 그리고 제주에 개고기 파는 곳도 모르고 사실 사주고 싶지 않았다. 


운명일까? 주변에서 개고기 잘하는 집을 안다고 한다. 나 참. 이길 수 없었다. 사촌시누부부, 남편과 나, 그 외 지인 분들과 음식점으로 갔다. 세상에 전골을 시켰는데 남편이 밥 2 공기에 전골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다. 다들 놀랬다. 나는 밥 반공기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남편이 더 달란다. 말리지 않았다. 먹고 싶은 만큼 먹으라고...


그날 밤부터 남편은 배앓이를 시작했다. 그리고 답답하다고 등을 두들겨달라고 한다. 체한 것 같다. 소화제도 먹고, 관장도 하고, 손도 바늘로 따보고, 별짓 다했다. 등 두들기며 졸다가 머리를 박기도 했다. 밤새 아팠다. 나는 방법이 없었다. 새벽에 119에 실려 제주대학병원으로 갔다. 119도 타보고 내가 별 걸 다 하는구나 싶었다. 제주대병원에서는 사진 몇 장 찍더니 서울로 가란다. 다니던 병원으로 가란다. 아무 말이 없다. 약도 없단다. 이 말을 듣자고 하루 종일 있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비행기로 서울에 와서 병원으로 바로 갔다. 응급실을 경유해 입원을 한 것이다. 응급실에서 나는 쪽잠도 잘 수가 없었고, 그냥 서서 밤을 지새웠다. 앉을자리조차 없었다. 입원실이 없어 응급실에서 대기해야 한단다. 그날 오후 입원실에 입원하여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야 나는 집에 올 수 있었다.


노인네들이 말한다. 사자밥을 먹었다고. 저승사자가 데리고 가려고 배부르게 밥을 먹였다고 말이다. 그 개고기 이후로 남편은 보름간 곡기를 끊었다. 정말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더라. 암은 폐로 번져 폐암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급기야 이동형 산소호흡기에 의존해야 했다.


병원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목욕을 시켜달라고 했고, 옷을 갈아입혀 달라고 했다. 그런 후 휠체어 산책을 시켜달라고 한다. 병원 쉼터에서 내게 말을 한다.

 

"여보, 미안해, 애들 좀 잘 부탁해. 나는 당신이 있어 애들 걱정하지 않아. 단지 당신한테 너무 미안해. 그동안 나하고 살아주느라 고생했어. 정말 미안해."

"그리고 나 때문에 당신 능력 펼치지 못한 것도 미안해. 내가 없다고 슬퍼하지 말고, 나 없이 자유롭게 살아. 당신하고 싶은 거 다 해. 누구에게도 구속받는 삶 말고, 당신을 위해서 살아줘. 부탁이야."

"내가 돈도 벌어놓지 못하고 가서 정말 미안해."


이 말을 하곤 그날 밤부터 산소 호흡기와 모르핀에 의존했고, 결국 나와 이별을 하고야 말았다.


나는 이날 귀한 시간을 선물 받았다. 남편의 건강을 위해 삼시세끼 밥을 차리고, 늘 신경 써서 약을 챙겨야 했고, 운동도 시켜야 했고, 주변 정리도 해야 했고, 쉬 피곤해하니 늘 함께 다녀야 했다. 이것으로부터 자유를 선물 받은 것이다. 선물 받은 시간이 정말 고맙다는 것은 느끼게 되기까지는 5년이 걸렸다. 사랑하는 남편이 내게 준 선물을 지금을 잘 사용하고 있다. "여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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