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휴가는 더없이 행복하고 특별했다.
휴가날짜부터 달랐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게 싫다는 남편 때문에 늘 여름의 끄트머리에 휴가를 다녀오곤 했었다. 딸들이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해엔 개학을 며칠 앞두고 썰렁해진 바닷가를 다녀오기도 했다.
올해는 남편이 먼저 “남들이 많이 떠나는 시기에 우리도 휴가를 다녀오자 “라고 말했다.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봤다.
“교우들은 거의 다 휴가를 마치고 교회에 나왔는데 목회자가 안 보이면 ……“
쌈박하게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둘이 떠나는데 시기가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남편이 물었다.”당신 어디 가고 싶어? “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우리가 처음 목회했던 ㅇㅇ교회에 가고 싶다. “라고 말했다. 남편이 서울의 출신교회를 떠나 처음 목회를 시작했던 교회였다.
평택역에서 버스를 타고 20여분쯤 가면 기와지붕의 한옥 교회와 마당의 종탑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교회였다. 그곳에서 남편은 7년 가까이 목회를 했다.
나는 예배 때 피아노반주를 하고 민망한 칭찬을 받았고, 동네를 오가는 길에 틈틈이 교회에 들르셨던 교우들 때문에 늘 긴장하며 stand by상태로 지내야 했던 교회였다. 작은딸의 돌잔치를 교우들의 정성으로 교회마당에서 아침부터 밤늦도록 동네잔치처럼 치르고 다음 해 여름, 남편은 서울 정릉4동 나눔의 집으로 목회지를 옮겼다.
남편은 “나눔의 집에 있었을 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라고 말한다.
이유는 나도 잘 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함께 “하고 싶었던 일들을” 원 없이 했으니까.
그 ‘좋은 사람들’중 한 분, ㅇㅇ준 선생님의 고향이 평택이었다. 서울 안암동에 있던 대학을 다니며 우리보다 먼저 나눔의 집에서 공부방교사활동을 하다 군대를 갔을 때, 남편은 나눔의 집 목회를 시작했다. 휴가를 나와 나눔의 집에 들렀던 ㅇㅇ준 선생님과 남편의 인연은 훗날 ‘목회자’와 ‘신자대표’로 이어졌다.
선생님은 지금 남편이 첫 목회를 시작했던 평택의 시골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남편이 그 교회에 있을 때엔 서로 전혀 알지 못하던 사이였다.
남편과 선생님의 오랜 인연은 그때 이미 시작되고 있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