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습니다. 성직자보다 더 성직자 같았던 선생님들!
지난 주일에 옛 주소이름, 서울 정릉4동, 삼양동 나눔의 집>에서 남편과 함께 일했던 선생님들이 원주에 오셨다. 딸들이 너 댓살 무렵부터 이모, 삼촌이라고 불렀던 이분들,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든지 남들이 부러워할 일터에서 편안한 삶을 택해 살았더라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을 텐데, 대학 때부터 산동네 공부방 선생님으로 오르내리던 서울 삼양동 달동네에 삶의 터전을 잡고 공부방교사로, 봉제공장에서 실밥을 따는 일부터 시작해 미싱일을 하며 생활도 함께했던,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가슴과 눈시울이 뜨끈해질 만큼 고맙고 귀한 분들이다. 암울했던 신군부 독재정권시대를 눈 딱 감고 모른 척 비껴갔더라면 행정고시를 거쳐 지금쯤 정부 고위 관료가 되었거나, 작가가 되었거나 물리학자가 되어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안정된 삶을 살고 계실 분들이다.
돌이켜보면, 남편은 이름처럼 정말 <복>이 많았다. 생각과 바라보는 곳이 같았던 선생님들을 운명처럼 나눔의 집에서 만나 원 없이 함께했으니!
그날, 선생님들은 내게 한결같이 물었다. “처음 나눔의 집 오셨을 때 사모님이 30대 초반이셨고 딸들이 겨우 다섯 살, 두 살이었는데 어떻게 그 어려웠던 세월을 견디셨어요? “
어찌 말씀드려야 솔직한 대답이 될지 잠시 머뭇거리는데 숙연해진 분위기에 민망해진 남편이 먼저 “아, 이 사람 날 만나 인생관도 바뀌었고 잘 살았지.”라고 말하는 바람에 내 진심을 말할 순간을 놓쳤다.
눈물 많고 감정이 여린,ㅇㅇㅇ선생님이 ” 그때 사모님의 나이가 지금의 저보다 훨씬 어리셨어요. 하고 싶은 일도 많으셨을 테고……“ 애써 눈물을 참아가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남편, 또 눈치 없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워보겠다고”아, 이 사람, 나만 있으면 …… “ 얼렁뚱땅 되지도 않는 농담을 시도했으나 눈물을 참아가며 울먹이듯 나직이 이어가던 선생님의 고백에 무참히 덮여버리고 말았다.
이번 만남뿐만 아니라 늘 나와 딸들한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들께 이제는 그 무거웠던 마음들을 내려놓으셔도 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어느 책 제목 <돌아보니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처럼 저에게도 나눔의 집 삶은 돌아볼수록 귀한 은총의 시간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평생 함께 할 <공동의 추억들>과, 듣고 또 들어도 유쾌한 <수많았던 우리들의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하게 우리 곁에서 살아 움직이며 아직도 모두에게 생애 가장 찬란하고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들로 남아 있으니까요!
그 이야기들을 내 기억력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글로 남겨 두고 싶은데……이 놈의 몹쓸 기억력이 잘 감당해 줄 수 있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