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머니!
***내가 비록 어머니의 고단하고 지난한 삶 전체를 다 알지 못해도 결혼 후에 막내며느리로서 뵈어온 어머니의 모습만큼이라도 글로 남겨두고 싶었다.***
처음 어머니를 뵙던 날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무렵 아버님과 어머님은 원주에서 고물상을 하고 계셨다. 한겨울이었고 마당 한편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온갖 고물들을 종류별로 분류하고 계셨다. 어머님은 고물상으로 첫인사를 하려고 찾아온 내가 행여나 마당에 얼기설기 널려있던, 쇠붙이들과 유리병을 담아 쌓아 둔 박스에 부딪칠까 봐 “아가, 조심하그라” 소리를 집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하셨다. 그때 아버님은 방 안에서 신문을 읽고 계셨다. 큰 물건들의 정리를 끝내고 잠깐 쉬시는 때였는지 몰라도 어머니의 모습과 겹쳐지며 낯설게 느껴졌다.
이와 비슷한 모습들은 결혼을 하고 나서도 때마다 들르는 동안 거의 변함이 없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조차도 다니신 분이 아니다. 그런데도 어머니가 고물상에서 주로 하셨던 일은 고물을 수집해 오신 중간 업자들과 고물의 무게를 단후 주판으로 셈을 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직책(?)을 맡고 계셨던 것이다. 한글을 읽고 쓰실 줄 아셨고 신문도 읽을 줄 아셨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후 밤 9시 뉴스보기를 즐겨하셨다. 어린 손녀들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 뉴스기사를 보신 후에는 어김없이 내게 전화를 하셨다. 특히 독감이 유행할 때는 신신당부를 하셨다. “애들 절대 학교도 보내지 말고 뜨신 방에 묻어 놓거라. “ 하시면서!
아무리 몸이 아파도 학교는 꼭 가야 하는 줄 알았던 나는 결혼 전부터 형님(작은 누나)한테 수없이 들어온 어머니의 전설 같은 이야기(아프면 무조건 학교를 쉬게 함)를 수없이 여러 번 다른 버전으로 들어왔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말 심하게 아플 때 말고는 어머니처럼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평생 국내 관광조차도 한번 제대로 안 하셨던 분이다. 자식들이 다 제자리를 잡고 잘 살고있어도 어머니의 삶은 늘 그대로 였고 변함이 없는 삶이었던 게 안타깝다.베푸신만큼 받기도 하셨더라면 자식들의 마음이 이렇게 먹먹하지 않을텐데……
친정엄마는 중고등 학생이었던 우리 삼 남매를 할머니한테 맡겨놓고 사촌이모들과 봄가을로 여행을 다녔고 동네 양품점 옷이었지만 철따라 마음에 드는 옷을 사입기도 했다.
어머니보다 한참 앞서 돌아가셨지만 그래서 그나마 위로가 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들들보다 며느리들이 어머니를 더 많이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