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헌산, 재약산, 천황산
등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쓰는 용어 중엔 일명 ‘자본주의 산행’이라는 말이 있다. 돈을 지불하고 케이블카를 이용해 정상 인증을 쉽게 하는 경우를 뜻하는 말이다. 영남알프스 완등 인증에 필요한 7개 산 중에 천황산이 여기에 속한다. 경남에 사는 친구와 함께 하기로 한 영남알프스 완등 인증은 매월 2개 산까지 가능하다. 1월에는 간월산과 신불산을 갔고, 2월에 가기로 한 곳은 고헌산과 천황산이었다. 내가 기차를 타고 이동하여 울산역에서 친구 차를 타고 가는 일정이다 보니, 서울에서 첫차를 타고 가도 등산로 입구엔 오전 8시 반쯤에 도착한다. 이동 동선과 돌아갈 일정을 고려했을 때 전부 그냥 올라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고헌산을 먼저 다녀온 후, 천황산은 케이블카를 타고 가기로 계획한 것!
고헌산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코스는 와항재에서 정상까지 가는 최단코스이다. 하산 후 천황산도 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저 없이 와항재로 향했다. 보통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라고 해도 계속 오르막길만 있는 게 아니다. 능선 따라 내리막길이나 평지가 나오는 구간이 나오기도 하는데 고헌산은 초반부터 경사가 좀 있고, 거의 오르막길 위주였다. 산 밑부분은 눈이 없었지만 올라가면서 조금씩 땅이 얼어있는 게 보여 중간에 아이젠을 꺼냈다. 경사길에 서서 끼다가 불편해서 옆에 보이는 조금 평평한 곳으로 이동하려던 중에 얼음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다행히 구르진 않고 엉덩방아에 그쳤지만 옷에 진흙과 먼지가 꽤나 묻었다. 잘 털어지지 않아서 친구 차를 탈 때 민폐가 될까 봐 걱정이었으나, 다행히 친구가 시트 보호를 위한 돗자리를 챙겨 왔다고 해서 안심했다.
고헌산은 와항재에서 올라가면 왕복 5km 정도로 코스가 짧다. 친구 차에 배낭을 놓고, 폰과 아이젠만 챙겨서 간편한 차림으로 올라가던 중에 장갑을 안 챙겼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1월에 갔던 간월산, 신불산은 정상에서도 따뜻했고, 경남 날씨 자체가 서울보다 기온이 높으니 괜찮을 줄 알고 그냥 올라갔는데 전혀 괜찮지 않았다. 고헌산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조망이 트이자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조금 시린 수준이 아니라 손이 온통 빨갛게 되고 아릴 정도였다.
정상 표시석에서 인증샷을 찍고 업로드해야 하는 짧은 순간조차 고통스러울 정도로 바람이 차가웠다. 사진을 올리자마자 망설임 없이 하산을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빨리 내려가고 싶었지만 얼어붙은 경사길을 내려가려니 속도를 낼 수도, 주머니에 손을 넣을 수도 없어서 미칠 것 같았다. 차에 도착하자마자 허겁지겁 장갑을 찾아서 꼈는데 천황산까지 이동하는 동안에도 손은 쉽게 따뜻해지지 않았다. 아무리 남쪽에 있어도 해발 1천 미터 이상의 고도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감한 순간이었다.
천황산은 케이블카가 있어서 쉽게 갈 수 있지만, 그만큼 관광객이 많이 찾아서 주말에 타려면 몇 시간 대기해야 할 정도라고 한다. 우리는 평일에 향했기에 탑승 대기를 하지 않아도 됐다. 날씨에 따라 케이블카를 운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다행히 정상 운행을 하고 있었다. 케이블카를 탑승해서 여유롭게 경치 구경을 하고, 안내방송으로 나오는 밀양시 관광 정보도 알차게 들을 수 있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천황산까지 가는 길은 경치도 좋고, 경사가 완만해서 관광 목적으로 가기에도 좋아 보였다. 다만 눈이 얼어붙은 구간이 꽤 있어서 아이젠은 필수였다. 3월까지는 등산할 때 아이젠을 필수로 챙겨야 하지만 관광 목적으로 온 사람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젠이 없어서 등산로 울타리를 잡으며 애먹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갔다.
원래 천황산 정상에서 인증을 마치고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하기로 했지만 이대로 끝내기 아쉬웠다. 천황산과 이어져 있는 재약산도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재약산은 영남알프스에 해당되는 산이지만 완등 인증을 해야 하는 곳은 아니다. 처음에는 포함되어 있었으나, 정상부 바위 비탈면의 안전 문제로 인해 제외되었다고 한다.
친구에게 재약산도 가자고 했더니 처음엔 반응이 좋진 않았다. 재약산으로 향하는 길에 내려가는 계단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돌아가려면 내려간 만큼 또 올라가야 하지 않냐는 친구의 말에 “어차피 운동은 땀 흘리고 고생하려고 하는 거다. 몸이 편하려면 집에서 누워 있어야지 뭐 하러 나오겠냐”라고 대꾸하지 않고 애써 못 들은 척했다. 대신 주변 경관이 멋있지 않냐고 화제를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그 전략은 효과적이었다. 천황산 정상에서 천황재까지 이어지는 길에 보이는 모습은 이번에 갔던 코스 중 가장 장관이었다. 드넓게 펼쳐진 억새 평원이 산새와 어우러져서 절로 감탄이 나왔다. 왜 영남알프스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납득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재약산에 본격적으로 오르는 길은 대부분 눈이 녹지 않은 상태였다. 초반엔 계단으로 정비된 길이 나왔지만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등산로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좁고, 가다듬지 않은 길이 나온다. 친구는 오히려 정비되지 않은 길을 반기는 눈치였다. 이래야 산 다워서 좋다며 생기를 찾은 모습을 보여 그나마 다행이었다.
재약산 정상에서 본 풍경은 천황산하고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정상에 계시던 아저씨께서 “날씨가 좋아서 부산까지 보인다”며 손가락으로 방향을 짚어주셨다. 처음엔 손가락을 보고도 어리둥절한 나와 달리, 친구는 부산에 자주 가서 그런지 금방 캐치했다. 친구가 해운대에 있는 건물이라며 짚어주고 나서야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재약산 정상은 고헌산과 달리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서 잠시 쉬다가 하산을 시작했다. 등산로가 얼음길이었지만 고헌산보다는 덜 미끄러웠다. 천황재에서 천황산 정상까지 야외 천국의 계단을 타는 기분이었지만, 이후에는 케이블카를 타는 지점까지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자본주의 산행 찬스를 이용하여 수월하게 1일 3산 오르기를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