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 천제단-문수봉-당골광장
코스 정보 : 태백산 유일사 주차장-천제단-문수봉-당골광장
등산을 취미로 하기 전엔 기상예보에 눈 소식이 있으면 “하늘에서 또 쓰레기가 내려온다”며 싫어했다. 웬만한 군필자보다도 더 극혐 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말이다. 대학생 때부터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까지 나는 경기도에서 서울로 대중교통을 타고 다녔다. 한 번은 폭설로 인해 왕복 3시간 거리를 6시간 넘게 걸려서 겨우 간 적 있다. 한참 동안 가다 서다 반복하는 전철에 앉아 멍하니 있을 때 느낀 건 공허함과 현타였다. 그날 이후로 겨울이면 매일 기상예보를 주시하며 전전긍긍했고, 눈이 너무 싫었다.
부모님 댁에서 독립하여 회사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사한 후부터는 걱정이 없어져서 눈을 봐도 덤덤해졌다. 등산을 시작한 이후, 겨울 산행의 재미를 맛보게 되자 다른 의도로 기상예보를 주시했다. 설산에 올라갈 최적의 타이밍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중, 수요일에 목-금에 연달아 잡힌 눈 소식을 보자마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주말에 설산 보러 가면 딱이겠다’
이런 내가 낯설고 놀라웠던 것도 잠시. 출입 통제 가능성과 토요일 날씨 예보를 살펴보며 목적지를 고민했고, 그렇게 정한 곳은 태백산이었다. 태백산은 산세가 험하지 않고, 초보자들도 쉽게 갈 수 있는데 특히 겨울에 인기가 많다. 마침 토요일에 출발하는 안내버스가 딱 1자리 남은 상태였기에 이건 운명이다 싶어 냉큼 예약했다.
토요일 새벽 4시 20분에 기상하자마자 태백시 날씨를 확인했다. 최저기온 영하 17도, 최고기온 영하 7도, 태백산 체감온도는 영하 20도의 맑은 날씨였다. 드디어 곰탕이 아닌 설산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절로 들떴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다가 휴게소에 잠시 내렸는데, 설산 보러 가는 사람이 많아서 명절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붐볐다. 설마 이 많은 사람들이 죄다 태백산으로 가는 걸까 싶어서 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등산 시작 지점인 유일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오전 10시 40분. 버스 측에서 안내한 코스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유일사-천제단-문수봉-당골광장으로 이어지는 11.1km 코스, 나머지 하나는 유일사-천제단-반재-당골광장으로 이어지는 8.9km 코스였다. 둘 중엔 전자가 더 길고 어렵다길래 전자를 택했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준비를 마치니 10시 57분. 등산로 입구엔 수많은 인파가 일렬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눈이 많이 내려서 길을 다 쓰지 않고, 다들 앞사람이 길을 내놓은 곳만 따라가는 형국이었다. 소규모 인원도 아니고 전국 산악회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한꺼번에 줄지어서, 천천히 올라가고 있더라.
나는 평소 성격이 급하고, 걸음이 빠른 편이라 앞에서 누가 천천히 걷고 있으면 속도를 내어 제치고 간다. 게다가 정상석엔 인증샷 찍으려고 줄 서느라 기본 20-30분은 걸릴 텐데 산악회 뒤를 얌전히 따라갔다간 정상까지도 오래 걸리고, 사진 찍기까지 최소 1시간은 넘게 걸릴 것 같았다. 버스 출발 시간에 맞춰 내려가야 하고, 같은 버스를 타고 출발한 사람들보다 긴 코스를 가야 하니 시간이 넉넉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평소 성격을 그대로 발휘했다.
사람들이 잘 안 다녀서 발자국이 거의 없는 옆길을 택하여 “먼저 지나갈게요”를 외치고, 빨리 걷기와 뛰기를 반복했다. 힘에 부칠 땐 잠시 사람들 사이에 꼈다가, 다시 옆으로 눈을 헤치며 가다가 반복하며 수십 명을 제쳤건만 그 앞에 또 다른 산악회가 수십 명 나타났다. 다시 지나갈게요 외침과 빨리 걷기, 뛰기를 시전 해서 제치는 걸 반복하니 사람이 없는 구간이 나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새로운 산악회 수십 명이 앞에 나타났다. 그럼 또 “지나갈게요” 외치기, 빨리 걷기, 뛰기 3단계를 시전 해서 제치고.. 올라가는 내내 이 과정을 되풀이하며 갔더니 정상 천제단까지 1시간 15분 만에 도착했다. 상고대는 없고, 바람이 차가웠지만 맑은 날에 설산을 구경하는 건 처음이라 그저 신나기만 했다.
정상 표시석엔 예상대로 사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고, 20분가량 기다려야 했다. 뒤에 서있던 사람에게 부탁하여 기념사진을 남긴 후 바로 문수봉 방향으로 향했다. 원래 산에서 오래 쉬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 기온이 낮아서 가만히 있으면 금방 추워지기에 움직였다. 문수봉으로 가는 길엔 사람이 없어서 좋았지만, 발길이 덜 닿은 만큼 눈이 다져져 있지 않고 꽤 쌓여 있었다. 종종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구간도 걸으면서 태백산의 고요한 정취를 즐겼다. 몇 번 넘어지고 미끄러지기도 했는데 눈이 쿠션역할을 해서 아프지 않았고, 썰매 타는 느낌과 약간 비슷해서 즐거웠다.
문수봉에 도착한 시간은 13시 24분. 천제단과 달리 사람이 많지 않아서 조용했다. 같은 산에서 조금 떨어져 있을 뿐인데도 분위기가 달랐다. 고요 속에서 하얗게 눈 덮인 세상을 바라보니 조금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설산 풍경을 잠시 감상하다가 하산을 시작했다. 갈림길이 나왔는데 하나는 천제단으로 가는 길, 다른 하나는 당골광장으로 향하는 길, 나머지 하나는 처음 보는 지점이었다. 다른 길은 발자국도 꽤 있고 눈이 높아봤자 무릎 높이였지만, 당골광장으로 가는 길만 발자국이 드물고 눈이 허벅지 높이에 달했다. 혹시 이정표를 잘못 본 건 아닐까 싶어서 gps를 확인했지만 그 길이 맞았다. 뒤돌아보니 10m쯤 뒤에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나랑 같은 코스를 가는지 문수봉 가는 길에서부터 몇 번 보였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에게 길이 맞는지, 가도 괜찮은 건지 물어보니 맞다고, 그냥 가자는 답이 돌아왔다. 혼자는 아니니까 괜찮겠지 싶어서 눈을 헤치며 갔다. 가다 보면 덜 쌓인 곳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으나 갈수록 쌓인 눈이 높아지더니 어느새 허리까지 오는 지경이 됐다.
불길한 생각이 스멀스멀 덮쳐오기 시작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뒤에서 떨어져 쫓아오던 남자가 “이렇게 가다가 눈이 더 높아지면 오도 가도 못하고 갇히게 됩니다. 도로 천제단까지 가는 거 어떠세요?”하고 말 거는 소리가 들렸다. 천제단으로 가서 8.9km 코스 하산길로 가면 안전하겠지만 시계를 보니 14시. 안내버스 측에서 제공한 정보엔 8.9km 코스 기준, 천제단에서 14시 40분에 출발해야 여유 있게 하산할 수 있다고 쓰여있었다.
문제는 그때가 14시였다는 점이다. 내가 있는 위치에서 천제단까지 대략 1시간 거리였고, 오르막길도 몇 번 거쳐야 했다. 15시에 천제단에 도착하여 내려가면 안내버스 출발 전까지 맞춰 갈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으나, 시간이 촉박하더라도 안전을 생각하면 돌아가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 그 사람의 어처구니없는 말이 이어졌다.
“저는 이런 길이면 더는 리딩 못할 것 같네요”
애초에 동행한 적도 없고, 앞장서서 눈길 헤치며 길을 내고 있는 건 나였다. 뒤에서 한두 마디 한 걸로 본인이 리딩했다며 허세라니! 황당하지만 트집 잡을 때가 아니었다. 천제단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기로 했다.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간 본인이 리딩한다는 착각을 단단히 할 것 같아서 이를 악물고 미친 듯이 속도를 내서 제쳤다. 한참 가다가 뒤를 보니 남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이러려고 평소에 운동했나’ 생각하며 오르막길을 반쯤 뛰다시피 올랐다. 다시 천제단에 다다른 시간은 정확히 14시 35분!!! 안내버스를 놓치면 처할 상황과 비용의 아찔함, 모르는 남자의 허세 부리는 꼴을 보기 싫은 심정이 합쳐진 덕분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다시 마음의 여유를 되찾고 당골광장 방향으로 내려갔다. 눈 쌓인 내리막길은 천천히 가는 게 오히려 더 미끄러질 것 같아서 좀 뛰기도 했다. 눈이 얼지 않아 발과 무릎에 부담이 가지 않은 덕분에 가능했다.
내려가는 길에 미니 썰매 같은 걸 가져온 등산객을 발견했다. 그들은 주변 눈치를 보면서 조금씩 타다가 일어서다 반복하고 낄낄거렸다. 눈 쌓인 등산로에서 썰매를 타면 다른 사람과 부딪칠 수도 있고, 썰매가 지나간 평평한 자리는 미끄럽기 때문에 나중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 굳이 썰매장에 가지 않고 등산로에서 시도하는 사람들 때문에 오죽하면 한라산 성판악 코스에서는 썰매 금지 표지판을 걸어둘 정도. 비매너 행위를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어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산 완료 후 핸드폰을 확인하니 15시 34분. 본래 가려던 코스보다 더 장거리 이동을 했지만 일찍 도착했다. 하산 지점에는 겨울 축제로 인산인해였다. 눈으로 만든 거대한 조형물이 있고 근처엔 먹거리 포장마차, 아기자기한 물품 만들기 체험부스까지 있었다. 등산객과 관광객이 뒤섞여 정신없었지만 덕분에 재밌는 구경을 하며 이 날의 산행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