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횡종주 재도전
새벽 4시에 울리는 알람 소리에 맞춰 눈을 떴다. 등산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는 날이면 등산하러 갈지 말지 내적갈등을 겪는다. 안내버스를 타고 이동할 땐 버스비를 날릴 수 없어서라도 꾸역꾸역 일으키지만, 비교적 가까운 곳이 목적지일 경우엔 아니다. 피곤해서 도로 자고 싶은 마음, 출근도 이 시간에 안 하는데 휴일에 뭐 하는 짓인가 싶은 마음이 나를 붙잡는다. 이 날도 갈팡질팡했지만 기왕 일어난 김에 가기로 결심했다. 고민은 출발할 시간만 늦출 뿐이다.
이번 목표는 북한산 횡종주 완주하기. 북한산우이역에서 출발해서 영봉, 백운대(정상)을 거쳐 문수봉, 비봉 등을 지나 족두리봉을 마지막으로 하여 불광역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등산로 입구 기준으로만 하면 약 16km 정도 된다. 24년 가을에 이 코스를 도전했는데 비봉에서 족두리봉 가는 길을 못 찾고 헤맸고, 체력적으로도 힘들어서 결국 다른 길로 내려가서 마무리했다(12편 참고). 날이 따뜻해지면 재도전할 생각이었으나 이 날 충동적으로 실행에 옮겼다.
북한산우이역에서 내려 영봉으로 향하는 길은 한 번 가봐서 낯이 익었기에 지도를 안 봐도 충분했다. 조금 오르니까 눈이 안 녹고 얼어있는 길이 나왔고, 이때부터 눈치싸움이 시작됐다. 이 결빙구간이 과연 짧게 나오고 끝날 것인지, 계속 이어질 것인지 알 수 없어서였다. 얼어붙은 길이 나오길래 아이젠을 착용하면 얼마 안 가서 완전히 녹은 땅이 나오고, 한참 가도 흙길이라 아이젠을 빼면 또 결빙구간이 나오고, 계속 미끄러울 것 같아 아이젠을 다시 착용하고 가면 또 흙길이 나오고.. 몇 차례 반복을 겪으니 점점 귀찮아져서 괜히 나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봉에서 백운대로 향하는 길엔 얼음이 조금 낀 정도가 아니라 길이 통으로 얼어있는 구간이 나왔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가는데 내 앞엔 아이젠을 가져오지 않은 사람들, 나처럼 등산로와 눈치싸움 하는지 있어도 안 끼는 사람들이 우르르 있었다. 그 좁은 얼음길을, 아이젠 없이 조심히 가겠다고 길을 막고 느리게 가고 있으니 속이 터졌다. 저러다가 누구 하나 넘어지면 도미노처럼 다 넘어져서 위험하니 뒤에 있고 싶지 않았기에 “잠시만요”를 외치며 제치고 올라갔다.
앱에서 안내하는 코스대로 따라가며 확인하니 백운대는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고, 지나서 다음 코스로 넘어가면 됐다. 백운대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와서 코스를 합류하면 1km가 추가된다. 오르내리는 길의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에 종주 코스에선 체력을 아끼기 위해 봉우리에 오르는 걸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또 ‘기왕이면’하는 생각이 나를 붙잡았다. 지난번에도 이렇게 힘을 빼다가 막판에 힘들었기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오르기로 했다.
아이젠을 착용한 채로 난간을 붙잡으며 바위를 올랐다. 얼음이 일부만 군데군데 얼어 있는 상태였는데 점점 얼음이 없는 곳이 많아지자 발이 불편했다. 길이 좁은데 뒤따라 올라오는 사람은 많았고, 옆으로 빠질 공간이 없었다. 아이젠을 빼기 위해 중간에 멈춰 길을 막을 수는 없기에 그냥 가려고 했는데 내 상황을 뒤에 계시던 아저씨가 알아차린 듯했다. 그분은 내게 “얼음이 많지 않은 바윗길에선 아이젠 착용 안 하는 게 좋아요. 착용하고 가면 무릎에 무리가 많이 가요.”라고 하셨다. 빼고 싶은데 비킬 공간이 없어서 그냥 그랬다고 답했더니 “기다려줄 테니 천천히 하세요”라며 배려해 주셨다. 산에서는 일행이 아니니 모른 체할 수도 있는데도 친절하게 알려주고, 챙겨주는 사람들이 많다. 자연의 경이로움, 멋진 주변 경관을 보는 것도 좋지만 사람의 따스한 온정을 느낄 수 있는 것도 등산의 매력이다.
백운대 정상석 인증샷을 찍고 내려가는데 미끄러져서 넘어질 뻔했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눈과 얼음이 남아있는 구역들, 눈이 녹아 물이 고이거나 진흙이 질퍽질퍽한 일명 ‘뻘밭’ 구역이 많으니 등산화의 접지력이 소용없었다. 아이젠을 낀 상태에서도 미끄러지고, 넘어지길 여러 번 반복했다. 그래도 다치지 않은 걸 감사하게 여겼다. 이 날 한 할아버지가 넘어져서 이마를 부딪혔는지 얼굴에 피가 흐르는 걸 목격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약을 발라주며 응급처치 하고 있었는데, 다른 곳은 안 다쳤는지 움직임에 큰 지장은 없는 듯했다. 등산을 오래 한 사람들은 산에서 본인이 큰 부상을 당한 경험도 있고, 근처에 있던 등산객이 쓰러지거나 헬기에 실려가는 상황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고 말한다. 산에 갈 땐 항상 안전을 신경 쓰고, 귀찮아도 상비약을 챙겨야 하는 이유이다.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다가 잠깐 나온 평탄한 구간이 나왔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고양이 두 마리가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고 좋아했는데 평화로움은 잠시뿐. 얼마 안 가서 또 계단길을 올라가야 했다. ‘국녕사’라는 절을 지나쳐서 가는데 야외에 있는 불상이 정말 거대했다.
등산할 때마다 느끼는 건데, 뻔한 얘기지만 산을 타는 건 꼭 사람의 인생 같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고, 평탄하다가도 낙석이나 공사로 인해 예상치 못하게 우회해야 하는 상황이 있고, 길을 잘못 들어서 헤매느라 고생하지만, 새로운 길에서 뜻밖의 경험을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가장 와닿는 건, 때때로 넘어지지만 결국 스스로 일어나서 마저 가던 길을 가야 한다는 점이다. 도구를 쓰든, 사람의 도움을 받든 혼자 힘으로는 버거울 때도 있다. 하지만 그걸 활용하는 것도, 하산까지 다리를 움직여야 하는 것도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대신해 줄 수 없다. 오직 본인에게 달렸을 뿐이다. 장거리 코스에 눈과 얼음이 많은 암릉은 난이도가 높아서 힘들었다. 빙판길에서 넘어졌는데 그냥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쉬고 싶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왜 사서 고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신세한탄을 했다. 그 순간, 뇌리를 스친 생각이 있다.
‘여기까지 나와서 움직인 건 내 의지였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까지 갈 수 있는 건 내 다리뿐이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스스로 해야만 한다. 오직 내게 달려있다’
잠시 잊고 있던 투지가 타올랐고, 다시 몸을 일으켜 움직일 수 있었다.
문수봉은 어려운 코스와 쉬운 코스로 나뉘는데 매번, 얼떨결에 어려운 코스로 갔다가 처음으로 쉬운 코스를 갔다. 그러나 말이 ‘쉬운 코스’ 일뿐 그리 쉽지는 않았다. 난간을 붙잡고 가파른 경사를 거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어서 진흥왕순수비와 코뿔소 바위로 유명한 비봉이 나왔는데, 작년과 달리 주저 없이 패스했다. 막판에 체력을 아껴야 하는 것도 있지만, 그냥 올라가기에도 위험한 곳인데 얼음까지 있는 상태여서 안 될 것 같다고 판단했다. 괜히 욕심내서 무리하다가 다치는 것보다 안전이 최우선인 법이다.
이번엔 족두리봉 가는 길을 헤매지 않고 제대로 찾았다. 고지가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기뻤지만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얼어붙은 바위 위로 난간을 붙들고 가야 하는 길이 계속되어 방심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해가 기울어지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백운대에 오르고 정상석에서 사진 찍으려 기다리고, 아이젠 탈부착을 반복하고, 등산로 정비 문제로 우회하면서 예상보다 소요시간이 길어졌다. 해 떨어지기 전에 내려올 거라 생각해서 랜턴을 안 챙겼기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계속 발을 옮겨도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속도가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족두리봉 하산길은 평탄한 등산로가 아니라 암릉길이었다. 작년 가을에 북한산에서 마주쳤던 분이 왜 하산 코스로 족두리봉을 추천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더라. 그나마 햇볕이 잘 들고, 고도가 낮아서 얼음은 없는 게 다행이었다. 발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서 잘 내려갈 자신이 없었기에 엉거주춤하게 반쯤은 앉아서, 반쯤은 서서 이동했다. 침착하려 애쓰며 차근차근 가다 보니 다행히 해가 떠있을 때 하산을 마칠 수 있었다. 이 날 고생한 덕분에 3일 동안 심한 근육통에 시달렸으나, 그만큼 체력과 실력이 늘었다는 걸 다음 산행에서 체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