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밭지옥이었던 3월의 영남알프스

영남알프스 가지산&운문산 연계산행

by 푸른치타
코스정보 : 상양마을-아랫재-가지산-아랫재-운문산-아랫재-상양마을


드디어 영남알프스 산 중에 힘들기로 악명이 높은 가지산, 운문산으로 향하는 날이 왔다. 두 산은 바로 옆에 있어서 연계산행으로 많이들 간다. 각각 따로 가도 난이도가 쉽지 않지만, 연계산행을 할 경우 1개 산을 오르고 내려갔다가 급경사를 다시 올라야 해서 체력이 꽤 필요하다. 차를 타고 가기 때문에 원점 회귀를 해야 해서 우리는 상양마을을 출발지로 잡았다.


사전 조사를 했을 땐 마을회관 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고, 주말엔 사람이 많으니 일찍 가는 게 좋다는 말이 많았는데 사실이었다. 오전 8시 20분쯤 도착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미 만차라며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에 차를 세우라고 했다. 마을회관에 주차해도 거기서부터 등산로까지 한참 걸리는데 마을에서 좀 떨어진 초등학교에 주차라니. 왕복 3km가 추가되었건만 친구는 얼마 안 되는 거리인 줄 알고 그저 해맑은 눈치였다. 하산할 때 지친 상태에서 갈 생각을 하니 결코 달갑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으니 불평하는 대신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상양마을로 들어서며 찍은 사진


마을에서 등산로까지 가는 길은 꽤나 급경사였다. 가지산, 운문산 경사보다 마을에서 등산로 가는 길 경사가 더 가파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지나가던 마을 어르신이 우릴 보고 잘 올라간다며 칭찬해 주시는 소리를 응원 삼아 등산로로 향했다. 아랫재까지 가는 길은 완만한 길이었는데 친구가 조금씩 뒤쳐지기 시작했다. 마을에서만 해도 씩씩하게 앞장서서 가던 애가 막상 산에서는 느릿느릿하니 의아했지만, 우리는 서로 옆에서 기다리며 같이 가는 타입이 아니기에 일단 계속 올라갔다.


아랫재에 도착하면 갈림길이 나온다. 한쪽은 가지산, 다른 한쪽은 운문산으로 가는 길. 둘 중 어디를 먼저 가든 정상 찍고 아랫재로 내려온 다음, 다시 다른 산 정상을 찍고 또 아랫재로 내려와서 상양마을로 나와 주차장까지 가야 한다. 이정표를 보니 아랫재 기준 가지산까지 3.9km, 운문산까지 1.5km라고 나왔길래 거리상 더 오래 걸리는 가지산부터 가기로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렇게 갈 경우, 운문산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에 운문산을 먼저 가야 체력적으로 힘이 덜 든다고 한다.



친구가 아랫재까지 오길 기다렸다가 가지산 방향으로 향했다. 올라가는 길은 날씨가 따뜻해져서 눈이 녹아서 질퍽질퍽한 구간, 다 녹은 눈 때문에 진흙이 뻘처럼 된 일명 ‘뻘밭’ 구간 투성이었다. 3월의 영남알프스는 뻘밭으로 유명하고 특히 가지산, 운문산, 고헌산의 뻘밭이 가장 심하다는 것 역시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3월에 갔을 것 같다. 지금이야 영남알프스 산을 전부 가봤고, 모든 계절에 등산한 경험이 있지만 당시엔 아니었다. 난이도가 어떨지 감이 오지 않는 데다가 등산을 본격적으로 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기 때문. 가장 난이도 높은 코스를 첫 목적지로 삼을 수는 없으니 뻘밭지옥인 점을 제외하면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을 한 셈이다.


아랫재에서 가지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 찍은 등산로


가지산은 거의 흙길이고 중간중간 바위가 좀 있는 너덜길이 있었다. 양지바른 곳에선 흙먼지가 날렸고, 응달진 곳은 질퍽거려서 옷과 신발이 엉망진창이었다. 주변에 있는 등산객들이 기나긴 뻘밭 구간을 보고 절규하듯 “내 신발 다 버리게 생겼다”며 최대한 안 밟으려 애쓰는 게 보였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멀끔한 상태를 유지하길 포기하고 정상 인증을 위한 웨이팅을 조금이나마 덜 하고자 속도를 내어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에 찍은 전경


어느 정도 올라가니 친구는 뒤돌아봐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기다렸다가 움직일까 싶었으나 정상 부근을 보니 인증샷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정상에 먼저 가서 줄을 서있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정상 도착하기 직전에 있는 ‘가지산장’에서 풍긴 라면 냄새가 상당히 매혹적이었지만, 이성을 붙들고 발길을 재촉했다.


가지산 정상에서 인증샷을 찍기 위해 줄 선 사람들


가지산 정상엔 작은 정상석과 큰 정상석이 각각 하나씩 있는데 작은 정상석엔 사람이 별로 없었고, 큰 정상석에 몰려 있었다. 기왕 간 김에 두 정상석 모두 사진을 남기고 싶어서 작은 정상석에서 먼저 찍고, 큰 정상석 웨이팅에 합류했다. 기다리다 보니 친구도 도착했는데 날 보자마자 “올라가면서 내가 정상 도착하기 전에, 이미 정상 찍고 내려오는 너랑 마주칠까 봐 걱정했다”라고 말했다. 친구의 말이 재밌어서 웃으면서도 기분이 참 묘했다. 한라산을 같이 올라갈 때도, 영남알프스 첫 산행지였던 간월산과 신불산에서도 나보다 훨씬 빠르게 앞서가던 친구였다. 쫓아가는 걸 포기하고 뒤에서 천천히 올라갔는데 2-3개월 만에 내가 먼저 올라가는 상황이 생기다니. 절대 버리고 가지 않는다, 웨이팅 먼저하기 위해 간 거라고 열심히 해명하고 이 모든 공을 북한산에 돌렸다.


가지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들
가지산 정상에서 아랫재로 향하는 길에 찍은 모습


다시 아랫재로 내려간 다음, 운문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가지산으로 가는 길보다 거리는 짧지만 급경사였다. 처음에는 흙길이 나왔지만 조금 더 올라가니 가지산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았다. 중간에 계단 데크길이 나오는데, 계단 한 단의 넓이가 발바닥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좁고 높이는 낮은 게 문제였다. 데크길 전체가 진흙으로 뒤덮이니 흙길, 바윗길보다 더 미끄러웠다. 올라가는 길에 넘어질 뻔했는데, 땅을 손으로 짚어서 간신히 상의를 사수했지만 손은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아랫재에서 운문산으로 향하는 초반 흙길에서 찍은 사진들


뻘밭지옥에서 조심히 이동하느라 앞사람들 속도가 느렸다. 내가 보기엔 틈새에 밟을 구간, 끝에 튀어나온 바위로 발을 지탱할 수 있는 곳을 밟으면 속도를 좀 내도 될 것 같은데 그걸 못 찾고 더듬더듬 천천히 가고 있으니 답답했다. 그래서 열심히 앞에 있는 사람들을 제치고 갔더니 나중에 친구가 “넌 어떻게 올라갈 때도, 내려갈 때도 그런 길에서 빠르게 가냐”라며 뒤에서 목격한 후기를 알려줬다.



운문산 정상에 오르며 찍은 사진들


정상이 가까워지자 뻘밭이 없어졌고, 마지막 관문으로 계단이 나왔다. 지친 상태였지만 올라가는 길이 힘들지만은 않았다. 코스가 얼마 안 남아서 기뻤고,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멋있어서 자연스럽게 기분이 들떴다.



운문산 정상은 다행히 가지산만큼 줄이 길지는 않았다. 가지산은 정상 주변이 울퉁불퉁한 바위였지만 운문산 정상 부근은 널찍하고 평평했다. 덕분에 경치 감상하기에도, 음식 먹기에도 좋아 보였다. 다 좋은데 통신사 데이터가 문제였다. 영남알프스 완등 인증 앱에 인증샷 업로드를 해야 하는데 올라가는 길에 5G가 LTE로, LTE가 3G로 바뀌더니 정상에서는 ‘신호 없음’으로 떴다. 신불산 정상에서 데이터가 안 터진다며 애먹는 사람들을 봤을 땐 남의 일인 줄만 알았는데 나도 비슷한 상황에 놓였다. 다행히 데이터를 껐다 켰다 반복하다 보니 간신히 LTE가 잡혀서 무사히 업로드할 수 있었다.


운문산 정상에서 찍은 까마귀


한참 기다렸더니 친구도 정상에 도착했다. 친구가 가져온 빼빼로를 얻어먹으며 쉬다가 하산을 시작했다. 산을 내려갈 때면 가끔 하체가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 든다. 체력도 빠졌고, 미끄러지지 않게 주의하면서 내려가니 올라갈 때보다 더 신경 쓸 게 많아서 그런 것 같다. 너무 힘들 땐 누군가가 헬기로 픽업해 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누가 등을 떠민 게 아니라 스스로 좋아서 온 건데 어쩌겠는가. 믿을 건 몸뿐이니 묵묵히 다리를 움직일 뿐이다. 친구도 지쳤는지 올라갈 때와는 달리 “아까도 이렇게 길이 길었었나?”라고 했다. 그래도 뭐든지 결국 끝은 있기에, 우리는 사이좋게 하산을 마칠 수 있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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