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수집 생활' - 이유미
책을 읽다 보면 가끔 남의 책장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정확히는 ‘저 사람은 어떤 책을 읽었을까’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저 사람은 어떤 책이 좋았을까’가 알고 싶어서다. 우리는 수많은 책과 텍스트를 접하면서 많은 실패를 경험한다. (혹시라도 내 글을 읽고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은 없길 바란다.) 그 시행착오를 누군가 대신해서 나에게 엑기스만 추천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장 수집 생활은 참 매력적인 책이다. 한 다독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책의 제목을 소개해주는 데다, 거기서 인상적이었던 문장까지 알려준다. 남의 책장을 마음껏 들여다 보는 기분이다. 관심이 안 생길 수가 없다.
저자 이유미 씨는 자신의 취미가 일로 연결된 행운아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책을 무척 좋아하고 그것을 읽다 마음에 드는 문장이 있으면 밑줄을 그어둔다.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따로 파일로 정리해서 분류까지 해둔다. 순전히 자기가 좋아서 시작한 그 습관은 카피라이터라는 그녀의 직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자신이 인상 깊게 읽은 소설의 문장들을 카피라이팅에 적극 활용한 것이다.
문장 수집 생활은 챕터마다 이유미 씨가 엄선한 책과 문장이 등장한다. 어떻게 그것을 만나게 되었고, 그것이 왜, 얼마나 좋았는지가 한 독서가의 애정 어린 글로 쓰였다. 읽다 보면 그 책이 궁금해지고 나도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혹은 별로여서 덮어버렸던 과거의 책도 다시 펼쳐보고 싶게 만드는데, 그게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책을 사랑하는 작가의 진심이 문장에서 느껴지고 읽는 사람을 동요케 한다.
책에 소개된 인상적인 문장 하나,
'뭐야, 너는 평생 은박 접시 위에 올라앉아 셀로판지에 곱게 싸여 있다 천국으로 직행하고 싶은 거야? 창피한 일, 쑥스러운 일 좀 하는 게 그렇게 겁나? 어딜 찔러도 약점 하나 드러나지 않는 인간이 그리 대답해? 바보! 인생이란 건 두세 달 뒤에는 이미 인생이 아닌 거야. 지금 이 순간만이 인간의 인생이라고!'
-다나베 세이코 <감상 여행> 북스토리, 2009-
이 문장을 읽고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나에게도 이유미 씨와 비슷한 습관이 있다. 좋은 문장을 만나면 밑줄을 쳐서 수집하는 습관. 그런데 이런 습관을 가진 사람은 알고 있다. 내가 좋았던 문장을 다시 찾아보면 예전 같은 감흥이 일지 않거나, 내가 왜 이 문장에 밑줄을 쳤는지 아리송해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작가도 같은 경험을 했던 모양이다. 생각해보건대 그 문장이 빛났던 것이 문장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문장이 있는 곳까지 읽는 동안 서술되었던 내용과 표현, 그리고 축적된 공기와 감정들이 그 타이밍에 그곳에서 문장과 만났기 때문에 빛났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작가는 자신의 애정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그치고 싶지 않았는지 조금 더 욕심을 냈다. 좋았던 책 속의 문장을 카피라이팅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도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챕터가 끝날 때마다 카피라이팅으로 활용한 예시를 오랜 경력의 카피라이터다운 조언과 함께 설명을 첨부했다. 아마도 작가는 이것이 현명한 구성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카피라이팅 교육도 하는 사람이라고 하니 그 마음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점이 무척이나 별로였다. 나도 창작자의 작업 과정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카피라이터를 꿈꾸지 않아도 그들이 어떻게 그런 좋은 문장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알고 싶다. 하지만 애정이 담긴 문장과 설명이 담긴 문장의 온도 차는 컸고, 그 둘을 한 챕터 안에서 동시에 담아내기에 이유미 씨는 전문 작가가 아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에서 다음 문장을 활용한 경우다.
‘여자의 인상은 이상할 만큼 깨끗했다. 발가락 밑의 옴폭진 곳까지도 깨끗할 것 같았다.’
이 문장을 같은 페이지의 밑에서 다음과 같이 카피라이팅으로 활용한다.
‘발가락 밑 옴폭진 곳을 만져봐도 향기만 묻어날 뿐. 부드럽고 고운 발을 위한 풋크림.’
어떤가? 함께 흥분하던 감정이 푹 식어버리지 않는가? 이것은 작가가 하나의 예시로 든 것으로 이런 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보여주려 한 문장이다. 그러니 공들여 쓴 좋은 카피라이팅 문장이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 문학적인 감성과 직업적인 의식이 한 챕터 안에서 매번 충돌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독자에게는 제살깎아먹기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좋은 문장에 대한 가슴 설레는 흥분과, 그것을 작가가 직접 제 손으로 찬물을 끼얹는 챕터 구성을 가져간다. 체감상으로는 절반 정도가 그런 아쉬움이 있었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는 정도였다.
이 책이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과 문장을 소개하는 데에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일부러 책을 뒤집어 뒤에서부터 읽으면 카피라이팅에 관한 지침만 따로 읽을 수 있게 해둔 것처럼, 자신이 좋아한 문장을 활용한 예시와 설명도 그곳에 담아두었다면 어땠을까. (이 책은 책 뒷표지가 거꾸로 되어있는데, 뒤에서부터 따로 읽을 수 있는 부록 파트가 편성되어 있다.) 그랬다면 매 챕터마다 아쉬움이 반복되지도 않았을 거고, 책과 함께 자신이 소속된 회사도 알리고 싶었던 저자의 응큼한(?) 마음도 저항감 적게 느껴졌을 것 같다. 좋은 편집자를 만나지 못한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문장 수집 생활이 아쉬움으로 그치는 책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그런 이유로 지나치기에 이 책은 너무나 맛있다. 앞에서 언급한 남의 책장을 훔쳐보는 매력은 여전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놓치지 말고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이 책을 읽을 때 햄버거 맥주와 함께 즐겼는데, 참 맛있었다.
문장 수집 생활은 굳이 분류하자면 에세이에 속할 것이다. 에세이에 대한 흔한 평가는 ‘가볍게 읽기 좋다’라는 것이다. 그 말에는 읽은 뒤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려도 상관없다는 뜻이 함의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에는 그냥 잊어버리고 지나치기엔 너무나 아쉬운 책과 문장들이 있다. 문장 수집가의 오랜 시간이 축적된 선택이다. 당연히 끌리는 책이 있고, 끌리는 문장이 있다. 남의 인생을 책 한 권에 거저 사는 느낌이다. 그러니 읽어보는 게 남는 장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