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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근 후의 서재 Apr 23. 2023

[서평] 너의 책장을 훔치고 싶어

'문장 수집 생활' - 이유미

 책을 읽다 보면 가끔 남의 책장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정확히는 저 사람은 어떤 책을 읽었을까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저 사람은 어떤 책이 좋았을까가 알고 싶어서다우리는 수많은 책과 텍스트를 접하면서 많은 실패를 경험한다. (혹시라도 내 글을 읽고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은 없길 바란다.) 그 시행착오를 누군가 대신해서 나에게 엑기스만 추천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그런 점에서 문장 수집 생활은 참 매력적인 책이다한 다독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책의 제목을 소개해주는 데다거기서 인상적이었던 문장까지 알려준다남의 책장을 마음껏 들여다 보는 기분이다관심이 안 생길 수가 없다


 저자 이유미 씨는 자신의 취미가 일로 연결된 행운아 중 한 사람이다그녀는 책을 무척 좋아하고 그것을 읽다 마음에 드는 문장이 있으면 밑줄을 그어둔다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따로 파일로 정리해서 분류까지 해둔다순전히 자기가 좋아서 시작한 그 습관은 카피라이터라는 그녀의 직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자신이 인상 깊게 읽은 소설의 문장들을 카피라이팅에 적극 활용한 것이다




'문장 수집 생활' 책 표지


 문장 수집 생활은 챕터마다 이유미 씨가 엄선한 책과 문장이 등장한다어떻게 그것을 만나게 되었고그것이 왜얼마나 좋았는지가 한 독서가의 애정 어린 글로 쓰였다읽다 보면 그 책이 궁금해지고 나도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혹은 별로여서 덮어버렸던 과거의 책도 다시 펼쳐보고 싶게 만드는데그게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책을 사랑하는 작가의 진심이 문장에서 느껴지고 읽는 사람을 동요케 한다



 책에 소개된 인상적인 문장 하나,

 '뭐야, 너는 평생 은박 접시 위에 올라앉아 셀로판지에 곱게 싸여 있다 천국으로 직행하고 싶은 거야? 창피한 일, 쑥스러운 일 좀 하는 게 그렇게 겁나? 어딜 찔러도 약점 하나 드러나지 않는 인간이 그리 대답해? 바보! 인생이란 건 두세 달 뒤에는 이미 인생이 아닌 거야. 지금 이 순간만이 인간의 인생이라고!'

                                -다나베 세이코 <감상 여행> 북스토리, 2009-

 이 문장을 읽고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나에게도 이유미 씨와 비슷한 습관이 있다좋은 문장을 만나면 밑줄을 쳐서 수집하는 습관그런데 이런 습관을 가진 사람은 알고 있다내가 좋았던 문장을 다시 찾아보면 예전 같은 감흥이 일지 않거나내가 왜 이 문장에 밑줄을 쳤는지 아리송해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작가도 같은 경험을 했던 모양이다생각해보건대 그 문장이 빛났던 것이 문장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던 것 같다그 문장이 있는 곳까지 읽는 동안 서술되었던 내용과 표현그리고 축적된 공기와 감정들이 그 타이밍에 그곳에서 문장과 만났기 때문에 빛났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작가는 자신의 애정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그치고 싶지 않았는지 조금 더 욕심을 냈다. 좋았던 책 속의 문장을 카피라이팅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도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그래서 챕터가 끝날 때마다 카피라이팅으로 활용한 예시를 오랜 경력의 카피라이터다운 조언과 함께 설명을 첨부했다아마도 작가는 이것이 현명한 구성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실제로 카피라이팅 교육도 하는 사람이라고 하니 그 마음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하지만 나에게는 이 점이 무척이나 별로였다나도 창작자의 작업 과정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카피라이터를 꿈꾸지 않아도 그들이 어떻게 그런 좋은 문장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알고 싶다하지만 애정이 담긴 문장과 설명이 담긴 문장의 온도 차는 컸고그 둘을 한 챕터 안에서 동시에 담아내기에 이유미 씨는 전문 작가가 아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에서 다음 문장을 활용한 경우다.


 여자의 인상은 이상할 만큼 깨끗했다발가락 밑의 옴폭진 곳까지도 깨끗할 것 같았다.’


 이 문장을 같은 페이지의 밑에서 다음과 같이 카피라이팅으로 활용한다.


 발가락 밑 옴폭진 곳을 만져봐도 향기만 묻어날 뿐부드럽고 고운 발을 위한 풋크림.’


 어떤가함께 흥분하던 감정이 푹 식어버리지 않는가이것은 작가가 하나의 예시로 든 것으로 이런 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보여주려 한 문장이다그러니 공들여 쓴 좋은 카피라이팅 문장이 아닐 수도 있다중요한 건 이 문학적인 감성과 직업적인 의식이 한 챕터 안에서 매번 충돌한다는 것이고이것이 독자에게는 제살깎아먹기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결과적으로 이 책은 좋은 문장에 대한 가슴 설레는 흥분과, 그것을 작가가 직접 제 손으로 찬물을 끼얹는 챕터 구성을 가져간다체감상으로는 절반 정도가 그런 아쉬움이 있었고나머지 절반 정도는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는 정도였다


 이 책이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과 문장을 소개하는 데에 집중했다면 어땠을까일부러 책을 뒤집어 뒤에서부터 읽으면 카피라이팅에 관한 지침만 따로 읽을 수 있게 해둔 것처럼자신이 좋아한 문장을 활용한 예시와 설명도 그곳에 담아두었다면 어땠을까. (이 책은 책 뒷표지가 거꾸로 되어있는데, 뒤에서부터 따로 읽을 수 있는 부록 파트가 편성되어 있다.) 그랬다면 매 챕터마다 아쉬움이 반복되지도 않았을 거고책과 함께 자신이 소속된 회사도 알리고 싶었던 저자의 응큼한(?) 마음도 저항감 적게 느껴졌을 것 같다좋은 편집자를 만나지 못한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문장 수집 생활이 아쉬움으로 그치는 책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그런 이유로 지나치기에 이 책은 너무나 맛있다앞에서 언급한 남의 책장을 훔쳐보는 매력은 여전하다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놓치지 말고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나는 이 책을 읽을 때 햄버거 맥주와 함께 즐겼는데참 맛있었다


 문장 수집 생활은 굳이 분류하자면 에세이에 속할 것이다에세이에 대한 흔한 평가는 가볍게 읽기 좋다’라는 것이다그 말에는 읽은 뒤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려도 상관없다는 뜻이 함의되어 있다하지만 이 책에는 그냥 잊어버리고 지나치기엔 너무나 아쉬운 책과 문장들이 있다문장 수집가의 오랜 시간이 축적된 선택이다당연히 끌리는 책이 있고끌리는 문장이 있다남의 인생을 책 한 권에 거저 사는 느낌이다그러니 읽어보는 게 남는 장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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