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 이디스 워튼
<순수의 시대>로 알려진 작가 이디스 워튼은 1962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또 다른 대표작인 <여름>은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들어선 1916년 파리에서 집필하였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는 쉰넷이었고 이혼을 경험한 상태였다. 나는 <여름>을 통해 이디스 워튼이라는 작가를 처음 접했다. 책을 읽자마자 섬세한 문장에 빠져들었고,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에 매료되었다. 유독 마음에 드는 소설을 찾기 힘들었던 올해 당당히 베스트 목록에 올라선 이유다.
소설은 노스도머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채리티 로열이라는 1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다. 마을 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던 그녀는 마을에 방문한 하니라는 남성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 이야기의 큰 줄기다.
처음에 소설을 읽다 보면 당혹감을 느끼게 되는데, 바로 이 채리티 로열이라는 인물의 성격 때문이다. 그녀는 당돌하다 못해 성격이 모가 난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업무인 도서관 사서에서 방만한 태도로 일관하는 데다 남들의 질문과 지적에는 날카롭게 반응한다. 소설의 주인공에게는 독자가 애정을 품을 만한 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독자가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하며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 초반에 묘사된 채리티 로열은 호감보다는 비호감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그 과정에서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곧 납득하게 되는데, 바로 로열 변호사와의 사연 때문이다. 노스도머의 유일한 변호사인 그는 ‘산’이라고 표현되는 지역에서 채리티를 데려와 키운 인물이다. 자신과 똑같은 로열이라는 성씨와 채리티(자선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라는 이름을 주었지만, 그녀를 딸로 입양하지는 않는다. 그는 아내가 죽자 10대인 채리티에게 아내의 빈자리를 메우고 나이 든 자신을 돌보기 위해 함께 결혼할 것을 권한다. 이 황당해 보이는 제안은 당시의 여성들에게 아주 비현실적인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작가는 이런 제안과 자신이 처한 환경에 굴복하지 않는 인물로 채래티 로열을 그리는데, 초반에 그녀의 성격이 날카롭게 묘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파격적인 이야기 설정이 등장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소설 초반에 등장한 이 사연은 소설의 스포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어디까지나 채리티와 하니의 사랑 이야기다. <여름>이라는 제목에서 이미 젊은 남녀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가 뜨거운 여름 햇살에 빗대어지리라고 예상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절반쯤은 맞는 이야기다. 내가 이디스 워튼에게 빠져든 이유이기도 한데, 작가는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는 과정을 잘 표현해 냈다. 아름다운 문장뿐 아니라 인간 행동 이면에 숨어있는 심리 묘사가 탁월해서 작가의 역량에 놀라게 된다. 1916년에 집필된 이 소설에 ‘방어 본능’ 같은 표현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녀는 새로운 시대의 지식에도 예민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와 정반대 지점의 이야기를 절반쯤 뒤섞어 놓은 혼돈을 그리고 있다. <여름>이라는 제목에서처럼 아름답기만 한 사랑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당신이 책을 읽는 동안 청초한 여름의 이미지에 푹 빠져들길 바란다면 그 기대는 온전히 채워지지 못할 거라는 뜻이기도 하다.
소설은 채리티와 하니가 가까워지는 전반부와 그들의 관계에 위기가 찾아오는 후반부로 나뉜다. 채리티는 시종일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려는 인물로 그려진다. 채리티와 관계가 깊어지는 전반부에는 로열 변호사의 청혼과 노스도머라는 시골 마을, 자신이 놓인 환경에서 벗어나려 하고, 후반부에는 자신에게 찾아온 위기를 타개하려는 능동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이 점이 소설의 가장 빛나는 지점인데, 채리티 로열이라는 인물은 고전 소설의 남녀 관계에서 흔히 드러나는 여성과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한때 김영하 작가가 <알쓸신잡>이란 프로그램에서 고전 연애 소설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다. 과거에는 한 번의 연애로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고 연애 횟수도 극히 적었기 때문에 어떤 선택이 최선인지를 시뮬레이션해볼 수 있는 시험대가 소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대부분의 고전 소설들은 어떤 남자를 선택해야 하는지, 어떤 결혼이 행복한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그 결혼은 대부분의 여성에게 주어진 숙명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디스 워튼은 그런 인식에서 벗어나 있다. 만약 다른 소설이었다면 하니와의 관계가 역경에 부딪혔을 때 여성은 울고불고 매달리거나, 미워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고 화를 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의 끝은 결혼이라거나, 이 역경을 해결할 방법으로 남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여성이 그려지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여름>의 채리티 로열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관계를 동등한 입장에서 바라보았으며, 거기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에 대해서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위기가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채리티의 태도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왜 저렇게 대범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도서관 사서 일에는 그렇게 불만을 품던 채리티가 역경 앞에서 누구의 탓도 하지 않는 것은 자립적이고 능동적인 자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 후반부에 보인 몇 가지 선택들은 너무 혼자만의 생각으로 정리한 것이 아닌가 답답하기도 하지만, 사랑과 결혼의 분리, 남녀 관계에서의 동등한 책임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인다. 100년도 더 오래된 소설임에도 이렇게 평등한 입장에서 남녀를 바라보고 자기 주도적인 결정을 내리는 여성을 그려냈다니 놀라울 정도다.
이 평등한 남녀 관계는 채리티라는 인물만으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이디스 워튼은 하니라는 남자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지 않는다. 실제로 하니는 극 중에서 참 좋은 남자로 그려진다. 그의 진실은 명백히 드러나지 않지만, 적어도 채리티 앞에서 그는 진실하다. 대표적으로 호숫가에서 로열 변호사와 문제가 생겼던 장면을 보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채리티에게 하니가 하는 조언들은 현실적이고 현명하다. 자기 주도적인 여성 캐릭터를 그리다 보면 그 반대편을 소홀히 하기 쉬운데, 이디스 워튼이라는 작가는 놀라울 정도로 남녀 캐릭터의 균형을 잡아낸다. 이들의 관계는 일방적이거나 의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공평하다.
이디스 워튼의 시대를 뛰어넘는 인식은 아주 역동적인 이야기 안에서 풀어진다. 다양한 이야기 형태가 발전한 현대의 관점에서도 후반부의 전개는 흥미롭다. 마지막 결말에 대해서는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거기서 끝날 줄 알았는데 한 번 더 꼬아서 나아갔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속했는데, 고전의 반열에 올라간 소설이 이렇게 반전을 쫓는 이야기 구조를 가져가리라고 기대하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결말이 ‘예측 가능했다’는 사람들의 감상이다. 이 ‘예측 가능했다’는 말은 이디스 워튼이 이 소설에서 계속 그려내려고 했던 시대상,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이 또렷이 드러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순히 주변 인물들의 인식뿐 아니라, 노스도머라는 작은 마을과 그곳을 짓누르는 듯한 ‘산’, 그리고 눈 뜨면 코 베일 듯한 도시의 풍경으로 잘 표현되었다는 뜻이다. 결국 작가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현실을 그리려고 했다. 그리고 그 현실을 매우 현실적으로 짚어내며 소설을 마무리한다. 언제나 자신의 운명 앞에서 자기 주도적 선택을 해왔던 채리티의 결말이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작가는 소설 초반부터 채리티를 통해 그 시대의 여성에 공감할 수 있도록 이끌었고, 그 효과는 결말에서 빛을 발한다.
나는 이 소설에서 이디스 워튼의 문장뿐 아니라 시대를 앞선 인식이 놀라웠다. 이건 현대의 작가들도 잘 해내지 못하는 부분이다. 아니, 현대의 여성들도 잘 갖지 못하는 태도다. 이디스 워튼이 살았던 시대보다 더 많은 선택지와 결정들이 주어졌음에도 여전히 많은 여성은 사랑과 결혼, 관계에 대해 과거의 관점에 얽매여 있는 경우가 많다. 현재 한국의 베스트셀러에 오른 연애와 결혼에 관한 소설을 떠올려 봐도 이디스 워튼이 살았던 시대의 다른 연애 소설들과 인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구시대(라고 여겨지는) 인식에 갇힌 소설이 지금도 널리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여름>에서 드러난 관계에 대한 인식은 더욱 돋보였고, 이디스 워튼의 엄청난 문장력과 휘몰아치는 이야기에 허우적거리며 소설을 다 읽었을 때는 맥주 한 캔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책을 덮고 난 뒤에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 이 소설을 집필한 작가와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해 나누고 싶었다. 이렇게 명민하고 빛나는 문장으로 사랑의 달콤함과, 적나라한 그 시대와, 그 시대를 뛰어넘는 인식을 보여줄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단 한 권의 소설로 나는 이 작가의 팬이 되고 말았다.
소설의 분량은 길지 않다. 하지만 그 안에는 참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남녀 간의 사랑, 여성, 시대 같은 키워드들은 전부 떼어버려도 좋다. 그냥 한 편의 작품으로 이 소설을 접해도 당신의 만족감은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는 소설의 페이지보다도 많은 이야기가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그 감정과 생각들을 잘 정리하여 나의 삶에 녹여낼 수 있다면 그 가치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여름의 끝자락에 읽은 <여름>은 올해의 그 어떤 소설보다도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