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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으며 번역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다

<밤하늘은 언제나 가장 짙은 블루> - 사이하테 타히

by 퇴근 후의 서재


<밤하늘은 언제나 가장 짙은 블루>를 처음 접한 건 영화였다.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일본 영화는 낙관적이지 않은 현실을 사는 일본 젊은이들이 연애를 통해 조금이나마 낙관적인 현실을 보려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사실 영화의 내용보다도 그 분위기와 영화의 톤만 기억에 남아있는데, 적당히 좌절하고, 적당히 우울하면서도, 적당한 톤으로 그 무거움을 타개하려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영화가 시를 원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jpg


영화의 원작이 된 것은 사이하테 타히의 <밤하늘은 언제나 가장 짙은 블루>라는 시집에 수록된 <블루의 시>다.

사이하테 타히는 조금 독특한 부류의 시인인 것 같다. 노래 가사와 그림책, 게임 등 다방면으로 재능을 펼치고 있다는 것뿐 아니라, SNS 같은 온라인 매체도 적극 활용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이런 배경을 다 떼어놔도 그녀의 시를 보면 조금 남다른 데가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녀의 시는 마치 누군가 온라인에 끄적인 글처럼, 혹은 SNS에 토해놓은 감정처럼, 시인 듯 노래 가사인 듯, 그러면서도 결국엔 시인 척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도시를 좋아하게 된 순간, 자살한 것이나 마찬가지야.

손톱에 칠한 색을, 너의 몸속에서 찾아보려 한들 헛일이겠지.

밤하늘은 언제나 가장 짙은 블루다.

네가 가여워하는 너 자신을,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한,

너는 분명 세상을 싫어해도 좋다.

그리고 그러하기에, 이 행성에, 연애 따위는 없다.


-블루의 시-



그녀의 시집에는 이렇게 시의 형태로 적인 것과, 산문의 형태로 적인 것 두 부류가 있는데, 출판사는 제목을 앞에 적는지 마지막에 적는지에 따라 이를 구분해 두었다.

다음은 산문 형태로 적힌 시다.



어여쁜 인생


재해 수준의 야경을 보고 싶다. 전 인류가 동시에 휴대폰을 켠다면, 하늘에서 사라지는 별도 있을까. 별을 죽일 수 있다면 한번 해보고 싶네. 혼자 사는 인간의 감정만큼 지루한 영화도 없다. 갑작스러운 흉통과 천재지변과 분노가 늘어선 걸 고독이라 부른다면, 나를 기다리는 건 고독사뿐이다. 탁한 바다색 분노에 이마까지 잠그고, 수평선 너머에서 유턴하는 무수한 배를 떠올린다. 나를 스쳐 가는 모든 인간이, 나 아닌 누군가의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너는 사랑마저, 욕설의 비료로 쓰는구나. 난방을 틀어놓은 방에서 흐려지는 유리창을 손으로 주워 담듯 지워나가는 사이, 창 너머로 뜨끈한 투명이 늘어간다. 세계가 건네는 상냥함의 리미트.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게 사람을 상처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우타다 히카루의 노래를 들으며 학교 운동장 냄새를 떠오른다면, 너의 유년은 아름답다. 가족을 향한 모욕에 제대로 격분하는 인류가 되어줘.

친구가 죽으면 슬프지만, 가족이 죽었을 때보다는 덜 슬플까.라는 생각은 사람이기에 드는 걸까, 사람이 아니기에 드는 걸까.

고독한 사람일수록, 어여쁜 인생.


밤하늘은 언제나 가장 짙은 블루.jpg


그녀의 시에는 모두의 안녕과 파괴를 모두 바라는 이중성이 담겨 있다. 그리고 돌려서 포장하려 하지 않고, 결정적인 순간 직설적이다. 이 묘한 매력은 몇몇 시에서는 아주 인상적으로 떠오르지만, 몇몇에서는 어설프게 실패하는데, 그때 이 시인의 단점이 드러난다. 마치 누군가가 온라인에 제멋대로 적은 듯한 글. 사이하테 타히의 시는 그런 약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시에 대해 굳이 글을 적으려고 마음먹은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바로 <블루의 시>를 일본어 원문으로 보게 되면서다. 그녀의 일본어 원문 시에는 ‘夜空はいつでも最高密度の青色だ’라고 적혀있다. 직역하자면 ‘밤하늘은 언제나 최고밀도의 푸른색이다’이다. 이 문장이 한국에서는 번역되면서 ‘밤하늘은 언제나 가장 짙은 블루’로 바뀌었다. 나는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조금 혼란스러웠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유사성을 생각할 때, 그리고 일본어에서 분명 ‘블루’라는 영어식 표현을 흔하게 사용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시인이 ‘푸른색’이라고 적은 것을 ‘블루’라고 바꾸는 것이 괜찮은 것인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고밀도’라는 한자어가 ‘가장 짙은’으로 바뀌었다. 확실히 한국어 번역 쪽이 방황하는 청춘, 안식을 얻기 힘든 도시의 이미지에 더 부합한다. 하지만 원문의 시는 그런 단어를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사이하테 타히의 시를 보면서 좋은 번역이란 무엇일까, 번역의 역할은 어디까지일까 많은 생각에 잠겼다. 정답은 없는 것 같다. 선택의 문제만 있을 뿐이지. 어느 쪽의 의견을 내놓아도 전부 타당하게 들릴 것이다. 다만 이 고민을 문득 떠오르게 한 시집을 보면서 책을 좋아하는 다른 누군가에게도 공유하고 싶었다. 시집을 보면서 번역에 대해 떠올리다니 감성적이지 못한 행동이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좋은 고민거리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이렇게 번역이라는 창을 통해 또다시 수많은 문학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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