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기 안내서> - 리베카 솔닛
리베카 솔닛이라는 작가를 이야기할 때면 나는 ‘문장’이나 ‘필력’ 같은 단어를 떠올린다. 그녀가 한때 어떤 글을 썼는지, 무엇을 이야기하는 작가였는지는 그녀의 문장이 가진 힘 앞에서 무색해진다.
그녀의 문장은 주로 에세이라는 장르를 통해 드러나는데, 보통 사람들이 에세이를 일컬을 때 붙이는 표현은 ‘읽기 편하다’는 것이다. 이 평가는 리베카 솔닛의 글에서 조금 달라질 수 있다. 그녀의 에세이도 다른 작가들처럼 자신의 일상을 팔아 쓴 것이지만, 거기에 다양한 지식과 사유, 통찰이 얽혀든다. 흔히 메타 인지라고 표현하는 그것이 돋보이는 글이다. 노래 이야기를 하다가 명언을 끌고 오기도 하고, 책의 어느 챕터에 등장했던 에피소드나 색에 관한 이야기, 명화에 대한 분석이 이어지다가 문득 자신의 일상이 끼어들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면 무척 정신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 모든 것들은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아주 정확한 재료로 쓰인다. 김치찌개 재료에서 두부를, 볶음밥 재료에서 감자를, 비빔밥 재료에서 미나리를 과감히 빼올 수 있는 것은 그것으로 무슨 요리를 할지 작가의 머릿속에 명확히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의식의 흐름 같기도 하고 사유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그녀의 글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녀의 글을 소개할 때는 딱히 할 말이 없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뚜렷한 서사의 구조를 갖지 않다 보니 문장에 대한 인상 외에 덧붙일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길 잃기 안내서>는 그런 약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책이다. 이 책은 ‘길을 잃는다는 것’을 주제로 그녀가 풀어낸 글이다. 초반에서는 말 그대로 물리적인 길 잃기에 대해 말한다. 인상적이었던 내용 중 하나는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훨씬 더 빨리 수색구조대에게 구조된다는 것이었다. 생존의 열쇠는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인데, 어른보다 아이들이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빠르기 때문이다. 작가는 에드거 앨런 포와 ‘lost’라는 단어의 어원, 수색구조팀의 이야기를 끌고 오던 와중에 이렇게 적는다.
요즘 사람들은 어쩌다 길을 잃었을 때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그리고 돌아갈 길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혹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서 길을 잃는다. 야생에서는 주의를 기울이는 기술이 필요하다. 날씨에 유념하는 기술, 걸어온 길에 유념하는 기술, 도중에 만난 지형지물에 유념하는 기술, 몸을 돌려서 뒤를 보면 앞으로 돌아갈 길은 그동안 왔던 길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기술, 태양과 달과 별을 읽어서 방향을 찾는 기술, 물 흐르는 방향을 아는 기술, 그 밖에도 읽을 줄 아는 사람에게는 자연을 읽을거리로 만들어주는 여러 단서들을 읽는 기술, 길 잃는 사람은 보통 지구의 언어인 저 언어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 혹은 멈춰 서서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또 다른 기술이 있으니 바로 미지 속에서 편하게 느끼는 기술, 미지 속에 있다고 해서 당황하거나 괴로워하지는 않는 기술, 길 잃은 상태를 편하게 느끼는 기술이다.
네이티브 아메리칸(흔히 인디언들이라고 부르는)들이 살던 땅을 백인들이 침략하던 시기에는 특정 부족에 포로로 잡히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했었다. 이들은 다시 백인 사회로 돌아왔을 때 자신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기록으로 남겼고, 이것은 미국에서 ‘포로 이야기(Captivity narrative)’라고 하는 하나의 문학 장르가 되었다. 포로로 잡힌 자들은 자신이 살던 환경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사회와 문화, 풍습, 그리고 언어 속에 내던져지는데, 리베카 솔닛은 ‘그가 길 잃은 상태에서 벗어난 것은 돌아옴으로써가 아니라 스스로 다른 존재가 됨으로써였다’라며 포로가 되었던 이들의 경험담을 통해 자아의 길 잃기에 대해서 말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존재의 상실을 통해 길을 잃었던 경험, 즉, 친구를 잃었던 경험, 사막을 아주 많이 닮은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헤어졌던 경험을 통해 또 다른 길 잃기에 대해서 말하기도 한다. 노래 가사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블루스라는 장르로 이어지기도 하고,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예술가의 한 장면으로 lost, 군대를 해산한다는 뜻의 고대 노르드어 los에서 왔다는 이 단어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잃다라는 단어 lost는 ‘상실’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래서 그녀는 잃어버린 기억, 잃어버린 자신의 가계도, 잃어버린 사랑, 사람, 혹은 우정, 그리고 정말로 사라져 버린 물건에 대해서도 글을 썼다. 놀라운 것은 이 두서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큰 줄기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공통으로 등장하는 몇 가지의 키워드로, 때로는 앞서 언급했던 문장으로 이 책이 여러 갈래의 줄기를 가진 하나의 생명체임을 독자에게 인지시킨다. 그래서 사실 리베카 솔닛의 글은 활자 자극에 대한 민감도가 높은 사람에게 호응을 얻는 편이다. 책을 다양하게 읽어서 온갖 종류의 글을 접해본 사람, 혹은 스스로가 좋은 글을 써보려고 노력했던 사람일수록 그녀의 매력에 빠져든다. 정말 탐나도록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녀의 글쓰기에는 독특한 리듬이 있는데, 이 리듬은 긴 호흡에서 빛을 발한다. 한두 문장으로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문단, 혹은 챕터, 더 나아가 글 전체로 나아갈수록 매력이 도드라진다.
행복한 사랑은 하나의 이야기이고, 해체되는 사랑은 서로 경쟁하며 대립하는 둘 이상의 이야기이고, 해체된 사랑은 산산조각 나서 발치에 떨어진 거울과 같다. 거울 조각들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비춰 보인다. 어떤 이야기는 근사했다고 말하고, 어떤 이야기는 끔찍했다고 말하고, 어떤 이야기는 만약 이랬더라면 하고 말하고, 어떤 이야기는 만약 그러지 말았더라면 하고 말한다. 이야기들은 도로 끼워 맞춰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껍질처럼, 방패처럼, 눈가리개처럼, 가끔은 지도나 나침반처럼 지녔던 이야기들의 끝이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자 내가 역사를 기록하는 일기장이 된다. 내가 자신을 알고 기억하도록 돕는 도구가 된다. 나도 그들에게 마찬가지다. 그랬던 그들이 사라지면, 그들과의 사소한 일화, 입버릇, 농담을 쓸 일도, 즐길 일도, 이해할 일도 사라진다. 그것들은 이제 탁 덮인 책, 혹은 불타버린 책이다. 그 집에서 나온 나는 예전과는 달라진 나였고, 더 강해지고 더 확고해진 나였으며, 나 자신과 남자와 사랑과 사막과 야생을 더 많이 알게 된 나였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것이 장벽이 되기도 한다. 그녀의 글은 사유적이다. 이야기가 아닌 생각으로 읽히는 문장이다. 흔히 말하는 ‘의식의 흐름’으로 쓴 글이 맞지 않는 사람은 무척 힘들 것이다. 게다가 글 전반에 걸쳐 비슷한 리듬이 반복되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도중에 지치기 쉽다. 일상의 사소한 에피소드를 통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에세이가 아니다 보니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길을 잃는 독자도 많을 것이다. 실제로 한 번 집중력을 잃어버리면 무엇을 읽고 있는지 놓친 채 지나치는 경우가 발생한다. 나는 그럼에도 그녀의 글 안에서 길을 잃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에세이라는 장르에서 기대하는 바가 명확한 독자, 또는 그녀의 영어식 표현이 부담스러운 독자는 리베카 솔닛의 책이 맞지 않을 것이다.
리베카 솔닛은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길을 잃어보는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스마트폰을 통해 늘 정확히 길을 찾고, 안전한 환경 안으로만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만약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 책은 당신에게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에 동의한다면, 혹은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글 속에서 기꺼이 길을 잃어볼 준비가 되어있다면 당신은 다양한 길 잃기에 대해 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풀어놓는 사유를 통해 당신도 한 번쯤 길을 잃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만약 춤추는 그녀의 필력에 장단을 맞출 수 있다면 기존의 에세이에서는 맛볼 수 없는 희열도 경험할 것이다. 그러니 기꺼이 길을 잃길 바란다. 이 글에서도, 당신의 인생에서도. 이 책의 부제는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이다. 친절한 안내서는 아니지만, 숱한 길 잃기를 경험한 그녀가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