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 존 윌리엄스
온라인 세계를 들여다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에게는 타인의 삶을 궁금해하는 마음이 있다. 관음증적인 욕망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들여다봄으로써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늠하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의 실수, 누군가의 착각, 시간을 들여 돌이켜 보니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후회를 통해 나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은 마음. 그럼에도 내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것이 인생이지만 말이다.
<스토너>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잘 투영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은 1910년 미 미주리의 농촌에서 태어난 윌리엄 스토너라는 가상의 인물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준다.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같은 작품이 한 인물의 삶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본성에 대해 다루려고 했다면, <스토너>는 삶 자체를 보여준다. 간략하게 요약하고 보면 대단치 않은 인물의 대단치 않은 인생이다. 그런데 소설의 주인공이라기엔 특별하지 않아 보이는 이야기가 신기하게도 나의 인생을 비추는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다만 모두에게 그런 경험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고, 스토너와 비슷한 결을 가진 성향의 사람, 인생을 내밀하게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심장을 뜨겁게 하는 것을 쫓아 삶의 방향을 바꿔본 사람에게 공명할 것이다. 반대로 적극적인 태도와 에너지로 세상을 대하는 것을 좋아하거나, 속 시원하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 누군가 역경에 부딪힐 때 공감보다는 조언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그냥 평범한 인물의 그저 그런 삶으로 읽힐 것이다.
소설에서 스토너는 인생에 여러 분기점을 맞이한다. 첫 번째는 평생 농업에 헌신해 온 부모가 스토너에게 대학에서 농업을 공부하길 권유하는 장면이다. 소설의 극초반에 부모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존 윌리엄스가 얼마나 좋은 작가인지 알 수 있다.
…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부모는 항상 늙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서른 살 때 이미 쉰 살처럼 보였다. 노동으로 인해 몸이 구부정해진 아버지는 아무 희망 없는 눈으로 식구들을 근근이 먹여 살리는 척박한 땅을 지긋이 바라보곤 했다. 어머니는 삶을 인내했다. 마치 생애 전체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순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독자 중에는 이와 비슷한 부모를 갖고 있거나, 부모 세대의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접해본 이들이 있을 것이다. 존 윌리엄스의 문장은 무뚝뚝하면서 헌신적이며 자녀 세대보다 적은 것을 누렸던 윗세대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잘 자극한다. 그래서 그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스토너가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장면에서 그를 응원하는 마음과 부모 세대에 대한 미안함과 동정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이 소설은 이렇게 나의 이야기였거나, 나의 이야기였을 수도 있는 공감 포인트들이 등장하는데, 여기에 끌려 들어가는 독자는 작품 세계에 푹 빠질 것이고, 그러지 못한 독자는 큰 감흥 없이 읽게 될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이 한참 동안 숨을 멈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부드럽게 숨을 내쉬면서 허파에서 숨이 빠져나갈 때마다 옷이 움직이는 것을 세심하게 인식했다. 그는 슬론에게서 시선을 떼어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온 햇빛이 동료 학생들의 얼굴에 안착해서, 마치 그들의 안에서 나온 빛이 어둠에 맞서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 학생이 눈을 깜빡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 스토너는 책상을 꽉 붙들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스토너가 대학에서 영문학을 만나고, 거기에 강렬하게 끌려들어가는 장면이다. 이런 묘사를 보면 아마도 작가인 존 윌리엄스도 굉장히 섬세한 내면세계를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특히 이 뒤에 스토너가 교실을 빠져나가는 장면에서는 흔히 HSP라고 부르는 고도로 민감한 부류의 사람이 아니고서는 묘사하기 힘든 대목들이 있다.
늦가을의 쌀쌀함이 그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창백한 하늘 아래 둥글게 말리거나 비틀려 있는 나무들의 벌거벗은 가지가 보였다. 수업에 들어가려고 서둘러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학생들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이 중얼거리는 소리, 돌로 포장된 길에 신발이 또각또각 닿는 소리가 들리고, 추위에 발갛게 변한 채 가벼운 산들바람을 피해 수그린 얼굴들이 보였다. 그는 호기심에 차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들이 자신과 아주 멀지만 또한 아주 가까운 존재인 것 같았다. 그는 이런 느낌을 간직한 채 서둘러 다음 강의에 들어갔다. 토양화학 교수가 강의를 하는 동안에도 필기하고 외워야 할 내용을 불러주는 단조로운 목소리에 맞서 그 느낌을 간직했다. 이 강의의 내용을 외우는 고된 과정이 점점 낯설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내면세계의 묘사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느냐에 따라 소설의 평가는 달라질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섬세한 내면세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잘 묘사해 나간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무척 기뻤다. 하지만 위의 내용을 강의실을 빠져나가 다음 수업에 들어갔다고 기억하는, 즉, 문장이 아닌 서사를 중심으로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이 소설은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이후 스토너는 영문학을 선택하고 박사 과정을 거쳐 교수가 되면서 몇 가지 인생의 큰 사건을 맞이한다. 그중에는 서투른 연애와 그보다 더 서툴렀던 결혼, 그리고 뜻대로 되지 않는 결혼 생활, 직장 동료와의 갈등,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문제, 자녀 문제 등 우리가 살면서 겪을 법한 사건들이 수두룩하다. 평범하다면 평범할 수 있는 이 이야기를 빛나게 하는 것은 존 윌리엄스의 인생을 통찰한 시선이다. 그는 훌륭한 작가들이 그러하듯 사람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있는데, 거기다가 인생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불필요하고 무엇을 착각했던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글을 쓴 것 같다. 그래서 그가 적은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그때 내가 빠뜨렸던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간과하고 오판했는지 돌이켜보게 된다. 거기서 공감하거나 위로를 얻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아직 겪어보지 못한 부분에서는 미리 인생을 시뮬레이션해보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이 작품은 서사가 아닌 문장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사로 기억하고 요약하려 하면 별 볼 일 없는 작품이 되고 만다.
스토너는 모든 사건을 자신의 방식으로 대처한다. 그의 성격, 신념, 살아가는 태도 그대로 맞선다. 그게 정답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그리고 올바른 해결 방법이어도 속 시원하게 해소되지 못하기도 한다. 주인공이 되고 싶지만 주인공이 되지 못한 우리 다수의 평범한 삶처럼 그의 인생은 흘러간다. 단순히 그런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 통찰을 담은 작가의 문장 덕에 이 이야기는 읽어볼 가치가 생긴다. 나는 무척 흥미롭게 소설에 빠져들었는데,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대목이 있다. 바로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을 하던 스토너가 뒤늦게 캐서린 드리스콜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진 장면이다.
캐서린은 영문학에 헌신했던 스토너가 발견한 빛나는 재능이자, 자신이 평생 헌신한 영문학이라는 세계에서 깊은 소통을 할 수 있는 연인으로 나온다. 왜 결혼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사랑이고,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섣부른 선택을 했던 스토너의 암담한 결혼 생활을 지켜본 독자라면 그가 뒤늦은 사랑, 진정한 연인 관계를 만난 것에 다행이라고 느끼기도 할 것이다. 내가 그랬다. 스토너가 살면서 한 번쯤은 사랑과 섹스, 대화에 빠져들 수 있는 연인을 만났다는 것에 감사했다. 하지만 이 관계는 결국에 불륜이다. 내연 관계를 알게 된 스토너의 부인 이디스는 아무 문제도 삼지 않지만, 이 소설을 썼던 존 윌리엄스는 1965년의 미국 사회가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대학 평판에서 위태로워지자 이별로 끝나게 된다. 끝까지 서로를 지키고 사랑하려 하지만 캐서린이 몰래 짐을 챙겨 떠나버리면서 정리되고 만다. 이때 작가는 스토너의 심정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그녀는 얼마 전부터 떠날 계획을 미리 짜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스토너는 그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그것을 미리 알지 못했다는 것에, 그리고 그녀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담은 마지막 편지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했다.
300페이지가 넘도록 묘사된 스토너라는 인물이 과연 저렇게 느꼈을 법한 사람이었나? 나는 의문이 들었다. 저 마지막 문장, 캐서린이 한순간에 사라져서 감사했다는 듯이 적은 표현은 소설이 발간될 당시의 독자들을 의식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스토너와 캐서린 모두 둘의 관계가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과 불안 사이에서 균열을 느끼기는 했지만, 스토너가 그 균열 때문에 상대가 조용히 사라져서 고맙다고 느낄 만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불륜이었던 관계에 대중의 비판이 더해질까 봐 두려워 작가가 비겁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 장면을 제외하면 나는 소설 전반에서 끊임없는 위로를 받았다. 나와는 다른 삶이지만 형태만 다를 뿐 그 이면의 유사한 점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작가가 마음만 먹었다면 스토너를 영웅적으로 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료 로맥스와의 관계라든가, 지적이지만 허영심 가득한 워커라는 학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에서 특히 그랬을 것이다. 혹은 성인이 된 딸의 문제, 그리고 퇴직을 앞둔 스토너의 노년에서 좀 더 빛나는 삶으로 만들어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작가는 그러질 않았다.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결국 부모의 삶을 답습하고, 인생에 닥쳐온 난관을 멋지게 돌파하지 못하는 것이 대다수의 삶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스토너는 그 대다수의 평범한 인생을 대변하는 인물이었고,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항상 극적인 전환기를 맞지 않는다.
나는 이 적당한 온도가 좋았다. 아마도 이 작품에는 존 윌리엄스 자신의 삶을 많이 녹여낸 듯 보이지만, 소설, 즉 허구라는 이름을 단 이상 어디까지가 진짜 그의 삶이었는지 파헤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보다는 더욱 빛날 수 있었지만 빛나지 못한 스토너의 삶, 어딘지 아쉬움과 미련이 조금씩 남아있는 그의 삶을 통해 각자의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스토너가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분명 그러한 시각에서 생각해 볼 지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65년에 출간된 이 소설이 무려 50년이 지난 뒤에야 빛을 본 데는 영웅의 삶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 평범한 인생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시대의 흐름과도 맞닿아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그런 점에서 도리어 영웅적이라고 표현했겠지만). 누군가의 평범한 인생의 기록이 내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을 때 당신의 삶은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스토너는 자신의 삶을 되짚어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위에 적은 이 소설의 일부에 마음이 움직였다면 꼭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