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신형철
문학평론가 신형철 작가의 두 번째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그가 여러 곳에 기고해 왔던 글들을 다섯 개의 챕터에 따라 묶어낸 책이다. 그 시기는 2011년부터 2018년까지 다양하다. 책의 제목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된 이유에 대해 책 1부 도입에서 이렇게 적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 ‘이제는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짓이다. 그러니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
이후 저자는 영화 <킬링디어>와 아가멤논, 발터 벤야민까지 인용하며 인간의 슬픔과 그것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쓴다. 서문부터 1부의 첫 글 <슬픔에 대한 공부>에 이르기까지 긴 글의 요지는 타인의 슬픔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공부’라고까지 표현하며 써 내려간 이 책의 초입에서 일반 독자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뉠 것 같다. 뭔 소리를 이렇게 어렵게 하나, 하고 책을 덮는 부류와 그가 던지는 온갖 지식과 수사들, 그것을 연결한 주장에 흥미를 느끼거나. 다행인 것은 이 도입부를 지나고 나면 이 책은 훨씬 쉽고 재미있어진다는 것이다.
책은 1부 <슬픔에 대한 공부>, 2부 <삶이 진실에 베일 때>, 3부 <그래도 우리의 나날>, 4부 <시는 없으면 안 되는가>, 5부 <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각 챕터의 글들은 전부 각기 다른 시기에 기고된 글들이다. 하나의 부류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그 글들이 연관성을 갖고 동일한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즉, 순서에 상관없이 취향에 맞게 골라 읽어도 무관하다는 뜻이다.
하나의 제목으로 구성된 글은 2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이며, 제목 옆에 내용과 관련한, 혹은 저자가 영감을 받은 작품의 제목이 붙어있다. 독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읽어봤거나 혹은 궁금한 제목을 따라 선택적으로 읽어보기 좋은데, 그중에는 문학뿐 아니라 영화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사회적 현상이나 담론을 다룬 글에는 아무런 작품도 언급하지 않기도 한다.
자신을 문학평론가라고 소개한 저자처럼 흔히 지식노동자라고 불리는 작가의 글에서 독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그 분야에 능통한 사람이 찾아다 주는 새로운 작품의 발견, 또 다른 하나는 교양에 도움이 되는 지적 정보의 습득. 신형철 작가의 책은 그 점에서 독자의 욕구를 충분히 충족한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문학을 다룬 글에서 주로 그러했고, 영화를 다룬 글에서는 그의 매력과 장점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저자처럼 한 분야에 오래 몸담으면서 집요하게 파고든 지식노동자들은 지나치게 지엽적인 내용에 빠져들거나,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연결된 내용에 크게 흥분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신나서 떠들어대지만, 그것을 읽는 바깥의 독자에게는 조금 낯선 이야기처럼 들린다.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 아닐 것 같은데, 글쓴이는 자기가 아는 내용을 쏟아내기에 정신이 없다. 신형철 작가의 글도 종종 그런 함정에 빠진다. 특히 영화 이야기에서 그럴 때가 있는데,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영화평이나 영화에 관한 글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오랫동안 몸담아 왔던 문학 이야기에서는 다르다. 문학평론가라는 칭호답게 자신이 사랑하는 문학 이야기를 할 때 그의 글은 좀 더 선명하게 자기 색을 드러낸다. 그가 소개하는 낯설지만 흥미로운 작품들은 어떤 문장에 끌렸고, 왜 빠져들었는지, 혹은 왜 이 글에 언급하게 되었는지 소개하는데,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읽고 싶어지는 충동이 생긴다. ‘나는 사랑이 안으로 침입하는 것인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조차도 아직 알지 못한다’고 적은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이나, ‘좀처럼 가지 않는 어두운 숲을 물려받았다’는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의 <소곡> 같은 작품을 소개하거나, 민음사에서 출간한 <이상 소설 전집>이 왜 좋은지를 설명할 수 있는 건 문학에 빠져 산 덕후(이런 표현을 써서 미안하지만, 긍정적 의미라는 걸 알아주길 바란다)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글을 쓸 당시 400호 발간을 맞은 ‘문학과지성 시인선’에 대해 ‘어느 출판사가 33년 동안 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라고 남긴 멋진 평도 문학평론가로 살아온 저자여서 쓸 수 있는 글이다. (비록 현실은 그의 멋진 문장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반면 실망스럽게도 그의 글이 삐걱대는 순간도 보인다. 앞선 영화 이야기 외에도 몇 개의 글에서는 지식 노동자인 그가 소위 ‘먹물’이라고 불리는 부정적 의미의 지식인처럼 비치는 대목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누가 대중을 존중하는가>에 실린 글로 평론가들이 좋다고 하는 작품과 대중이 좋다고 하는 작품의 간극을 이야기하면서 ‘쉽고 재밌기만 한 작품’이 ‘나를 포함한 대중을 아무 생각 없이 재미만을 탐닉하는 소비자 정도로 얕잡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과거 평론가들은 일반 대중보다 많은 정보와 작품을 접하면서 그 지식을 바탕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역할에 치중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식인 취급을 받았고, 그들의 목소리는 존중받았다. 하지만 인터넷의 발달로 온라인에서 많은 정보가 공유되고, ‘대중적인 것’과 ‘의미 있는 것’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취향의 다양성이 인정받는 시대가 되면서 이런 논쟁은 무의미해졌다. 그런데 대중성과 의미 있는 것으로 나누는 저자의 인식은 조금 구시대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물론 해당 글은 2015년에 작성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저자의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이 책의 3부는 주로 사회적 이슈들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이 발간되었던 시기상의 이유로 박근혜의 탄핵이나 용산 참사, 희망 버스 같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당시 사회적 논의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현재 시점에서 저자의 글이 새롭다기보다 충분히 들었던 익숙한 이야기로 느껴질 것이다. 반면 해당 사안에 큰 관심을 갖지 못했던 사람에게는 귀담아 볼 만한 담론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2025년의 시점에서 조금 지난 이야기 같다는 인상은 지울 수가 없다. 뒤늦게 책을 접한 독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신형철 작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깨닫게 하는 책이다. 글 곳곳에 뿌려놓은 지식 노동자의 성취는 달콤하다. 반면 영화 이야기나 몇 가지 주장들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세상을 사는 먹물 지식인의 면모도 엿보인다. 개인적으로는 60퍼센트 정도의 글에 만족했고, 나머지 40퍼센트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이 책은 시도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 저자가 사랑하는 문학 작품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쓴 글은 매혹적이다. 나도 그를 따라 그 작품들을 읽어보고 사랑에 빠져보고 싶어진다. 독자들의 이 욕구를 읽었는지 책의 후반에는 부록으로 저자가 추천하는 작품 리스트를 별도로 뽑아놨다. 그것도 단순한 추천작이 아니라 소설, 에세이, 시 등 장르로 구분하기도 하고, 노벨라(중편 소설) 베스트를 따로 뽑기도 했으며, 그걸로도 부족해 인생 책을 꼽은 목록도 실려 있다. 그걸 따라가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것이다. 하지만 지식인의 책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들, 특히 여러 철학자와 신화들을 언급하고, 정의하거나 논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만약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면 한 번 시도해 보길 권한다. 찍어 먹어봐야 내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게 취향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