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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문학부터 SF까지 한 권의 책 안에 담아내는 작가

<기묘한 이야기들> - 올가 토카르추크

by 퇴근 후의 서재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가 쓴 단편집 <기묘한 이야기들>에는 말 그대로 기묘한 내용의 단편들이 실려있다. 제목에서 괴이함이나 공포, 스릴러 등을 연상하기 쉬운데 다행히 그런 장르들은 비켜 나간다. 하지만 작가의 상상력이 풀어내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낯선 작가의 국적만큼이나 독특하고 개성이 넘친다. 책에는 총 열 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그중에는 다섯 페이지에 달하는 짧은 소설(승객)부터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환상 문학(녹색 아이들), 종교적 체험을 다룬 듯한 여행기(심장), 근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방문)와 역시 SF를 베이스로 인간의 재탄생을 다룬 이야기(트란스푸기움)까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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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다 보면 가장 놀라게 되는 것이 이렇게 다양한 장르를 다룰 수 있는 작가의 필력과 지식이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단편 중에는 읽는 동안 머릿속에 시각화가 되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독자를 끌어들이는 서사의 집중력을 갖고 있다. 다양한 장르의 각기 다른 이야기들임에도 대체로 균등한 몰입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모래시계를 오래 사용하다 보면 모래알이 마모되면서 더 빨리 흘러내리게 된대요. 그래서 오래된 모래시계는 점점 빨라지게 마련이죠. 선생님은 이런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우리의 신경망도 모래시계처럼 닳고 닳아 지쳐버린 거예요. 구멍이 숭숭 뚫린 거름망처럼 모든 자극이 신경망을 술술 통과해 버려서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 거죠. (71p, <솔기> 중)


개인적인 취향 문제겠으나 그녀의 단편 중에서는 SF가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짧은 단편 안에서 작가가 창조한 용어나 새로 만든 세계관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트란스푸기움>에 등장한 이모 페이크(EmoFake)처럼 한국 포털에는 제대로 검색조차 되지 않는 최신 정보가 등장하기도 한다. 책 곳곳에 숨겨진 다양한 과학 지식을 접하다 보면 이 작가가 얼마나 끊임없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놓지 않고 공부해 왔는지를 알 수 있다. 무려 1962년생에다 부커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인데도 말이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국내에는 <방랑자들>와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라는 작품으로 주로 알려진 것 같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2017년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받은 아그니에슈카 홀란드 감독의 영화 <흔적>의 원작이 된 작품이다. 다른 책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그녀는 급진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책에는 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내용들이 곳곳에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녹색 아이들>이다. 소설에는 오시로트카가 말하는 숲 속 세상이 일종의 이상향처럼 그려진다.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이 숲의 열매와 버섯, 호두를 섭취하는 것만으로 살 수 있고, 상하 관계가 없으며, 모두의 결정과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세계. 공동체에 생긴 아이는 모두가 같이 키운다고 묘사한 것을 보면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문제들이 전부 해결된 곳처럼 보인다. 또한 <트란스푸기움>에는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분하기 힘든 최 교수가 등장하며, 다른 작품에서는 ‘동종의 개체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주요 인물로 설정되기도 한다. 또한 동물권과 환경에 대한 관심도 지대한 것으로 보이는데, 소의 시체가 쌓인 곳에 남은 것은 ‘뒤틀리고 반쯤 소화된 듯한 플라스틱 봉지들, 유명 브랜드의 선명한 로고가 새겨진 쇼핑백, 끈과 고무줄, 뚜껑, 조그만 일회용 컵들’이었다고 묘사한 장면이 대표적이다.


어머니의 얼굴은 창백했고 수심이 가득했다. 그녀의 입술은 마치 ‘조금만 더 견디렴, 조금만 더 참으면 돼.’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처럼 꽉 다물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레나타의 결정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어머니는 늘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마치 이 표정을 제복처럼 걸치고 있는 듯했다. 이 표정은 ‘오직 심각하고 중요한 사안일 때만 내게 다가오세요.’라고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 (162p, <트란스푸기움> 중)


그렇다고 그녀가 이런 키워드들로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책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과, 삶과 죽음, 재탄생,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질문을 이렇게나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개인적인 평가로 들어갔을 때 이 책이 만족스러운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앞서 언급했듯 취향의 문제로 그녀의 SF 작품들이 흥미로웠지만, 초반에 등장한 <승객>이나 <녹색 아이들> 같은 소설은 그리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한 <기묘한 이야기들>에 실린 작품들은 대체로 열린 결말 혹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기승전결이 또렷하거나 명확한 메시지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맞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짧은 작품 안에서 작가가 창조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불친절한 내용을 분석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보니 더 이상 뇌를 혹사시키기 꺼려하는 독자들도 이 단편집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특히나 마지막 작품 <인간의 축일력>은 저 두 경우에 전부 해당하는 작품이다. 왜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는 건지, 레콘은 무엇이고 모노디코스는 어떤 존재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마무리된다.


마치 따뜻한 후광이 안나 수녀를 둘러싸고 있는 듯했고, 그녀 주위의 공기가 힘차게 박동하는 것 같았다. 원장 수녀가 그 후광을 낚아채서 유리병에 담아 팔았다면 틀림없이 큰 돈을 벌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191p, <모든 성인의 산> 중)


하지만 나는 이 단편집에 실린 SF 작품들만으로도 한 번쯤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트란스푸기움>에서 여러 인물을 영화적으로 잘 배치한 작가의 솜씨와 작품이 던지는 질문과 여운이 참 좋았다. <방문>과 <모든 성인의 산>처럼 반전이 펼쳐지는 이야기에선 깜짝 놀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낯선 작가만큼이나 낯선 스타일의 소설이지만, 새로운 창작 세계를 접해보고 싶은 사람, 과학부터 판타지까지 모든 장르를 어우르는 솜씨를 지켜보고 싶은 사람, 동물권-삶-죽음-존재-환경-재탄생 같은 키워드들에 끌리는 사람들은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어떤 작품이 되었건 낯설고 낯선 분위기로 기묘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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