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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일 줄 알았는데 호러로 끝난 이야기

<맡겨진 소녀> - 클레어 키건

by 퇴근 후의 서재

클레어 키건은 언제부터인가 계속 이름이 들려오는 작가였다. 그녀가 쓴 소설들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고,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맡겨진 소녀>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썩 끌리는 작품은 아니었는데, 행복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던 소녀가 다른 사람에게 위탁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예상이 되는 데다가, 신파에 가까운 내용일 거라고 추측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이 이야기는 결국 좋은 양육이란 무엇인가,라는 논의로 확산될 것이 뻔했다.


맡겨진 소녀 표지.jpg


오랜 시간이 걸려 드디어 손에 들게 된 <맡겨진 소녀>는 생각했던 것보다 담백한 작품이었다. 아주 짧은 분량의 이 작품은 다른 소설이었다면 더욱 길고 풍성하게 묘사할 수도 있었던 것들을 과감하게 생략해 버린다. 마치 소녀가 자라던 한산한 아일랜드의 풍경처럼, 혹은 많은 것이 억압되어서 표현되지 못했던 소녀의 과거처럼. 소설은 소녀의 시점을 따라 현재 시제로 묘사되는데, 그 점 때문에 독자는 더욱 소녀의 입장에 몰입하게 된다.


아빠가 아주머니에게서 루바브를 받지만 아기라도 안은 것처럼 어색하다. 루바브 한 줄기가 툭 떨어지더니 또 한 줄기가 떨어진다. 아빠는 아주머니가 루바브를 주워 건네주기를 기다린다. 아주머니는 아빠가 줍기를 기다린다. 둘 다 꼼짝도 하지 않는다. 결국 허리를 숙여 루바브를 줍는 사람은 킨셀라 아저씨다.


위에서 세 인물의 성격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처럼 작가는 많은 것들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을 어렵지 않게 아이의 시선에서 짚어낸다. 때로는 아이치고는 지나치게 통찰력이 있긴 하지만, 담백하면서 쉽게 쓰인 문장과 그 안에 담긴 함의들이 짧은 분량에도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소설은 소녀가 외가로 추정되는 친척 집에 맡겨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녀의 집에는 이미 많은 아이들이 있고, 소녀의 어머니는 임신 상태다. 모든 아이를 돌보기에는 벅찼던 부모는 소녀를 친척 집에 잠시 위탁하기로 한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 도착한 소녀는 새로운 양육자와 하나씩 손발을 맞춰가는데, 그 과정에서 소녀가 겪었던 모진 생활들이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그런 암시적 내용이 없더라도 소녀의 짐도 내려주지 않고 그냥 떠나버린 무심한 아버지의 모습에서 이미 예상이 되지만 말이다) 그런 곳에서 자란 소녀는 평온하고 안정적인 아저씨 아주머니네 집이 어색하다. 그래서 마음 한편으로는 이 평온함이 곧 깨지기를, 더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기도 한다. 아이의 그런 마음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소녀가 이 새로운 환경에서 계속해서 살아가기를 응원하게 된다.


모든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던 소설의 기조와는 다르게 노골적으로 정보를 드러내는 장면도 있다. 소설의 중반, 소녀를 맡은 킨셀라 부부의 사연에 관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조금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그 정보를 활용한다. 어떤 면에서는 평온하던 초반에 비해 극의 긴장도가 상승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상승된 긴장도는 뒤에 이어지는 우물과 관련된 에피소드, 그리고 아저씨와 소녀가 떠나던 해변의 밤 산책 장면에서 활용된다. 계속 평온하고 안정적인 소녀의 일상만 보여줬다면 이 두 장면에서 독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초조해지는 기분을 못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작가가 짧은 분량의 소설을 얼마나 영리하게 구성했는지 알 수 있다.


소설은 결국 소녀가 원래 가정으로 돌려보내지는 마지막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앞서 그녀의 변화한 생활을 지켜봤던 독자로서는 가슴 아픈 대목이다. 소설의 원제 ‘foster’는 사전에서 ‘(수양부모로서) 아이를 맡아 기르다, 위탁 양육하다’라는 뜻으로 풀이되는데, 한국어 제목이 소녀의 입장을 나타내는 반면, 원제는 양육자의 시선을 드러낸다는 점이 흥미롭다. 앞서 언급했듯 이 소설은 결국 양육이라는 것, 특히 좋은 양육이란 게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는 점에서 소설의 제목도 그렇게 정해졌을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가 소설에 대한 전반적인 리뷰지만, 이후에 언급할 내용은 어쩔 수 없이 스포일러를 담고 있다. 그래서 소설을 읽어본 사람 혹은 결말을 알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읽었으면 한다.




원래 소설은 그렇게 끝나고 말아야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나에게 공포로 느껴졌다. 아이를 돌려주고 떠나려는 킨셀라 부부를 쫓아 뛰어나가는 소녀. 마치 처음 아저씨가 우편함으로 심부름을 보냈던 때처럼 소녀는 전속력으로 그들에게 뛰어간다. 가슴속이 아니라 손에 쥐어진 것 같던 심장이 시키는 대로. 그리고 소녀는 그대로 킨셀라 아저씨에게 부딪친다. 끌어안는 건 아저씨다. 소녀는 한 번도 포옹하지 못한다. 마치 자발적으로 애정이 담긴 행위를 해보지 못한 사람처럼. 자동차에 타고 있던 아주머니는 울고 있고, 소녀는 아저씨의 품에 안겨 멀리서 다가오는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본다. ‘손에 지팡이를 들고 흔들림 없이 굳세게 다가’ 오는 아버지를 보고 소녀는 ‘경고’한다. “아빠.”라고. 그리고 또 한 번 그를 부른다. “아빠.”


이것이 소설의 마지막이다. 나는 이 마지막 장면이 무서웠다. 옮긴이는 이 장면에 대해 아저씨에게 자기 아빠가 오고 있다고 경고하는 말일 수도 있고, 자신을 사랑으로 돌봐준 킨셀라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르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고 적는다. 하지만 내게 이 마지막 장면은 곧 벌어질 폭력적 행위를 눈치챈 소녀가 아빠에게 경고하며 외치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지팡이를 들고 걸어오고 있는 아빠가 그 뒤에 어떤 행동을 벌일지 소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소설을 끝내다니. 소녀를 킨셀라 부부에게서 떨어뜨려 놓은 것만으로도 이미 가슴이 아픈데 공포를 암시하는 마지막으로 소설을 끝내버린 작가에게 놀라고 말았다. 물론 그 점 때문에 이 작품이 더욱 강렬한 인상으로 남고 말았지만 말이다.


감동일 줄 알았던 소설은 호러로 끝났다. 직접 읽어본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익히 들어온 명성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짧은 분량으로 풍성하게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는 건 훌륭한 재능이다. 지금까지 나와 같은 우려로 이 소설을 펼쳐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한 번 도전해 봐도 좋을 것 같다. 생각보다 신파적이지 않고, 담백하면서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문장들이 가득하다. 아주 짧은 소설이지만, 소설이 함유한 것들은 다른 분량의 소설들 못지않다. 게다가 이 책은 좋은 양육을 넘어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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