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올바른 욕망이란 건 없다

<정욕> - 아사이 료

by 퇴근 후의 서재


한때 우스갯소리처럼 전해지던 이야기가 있다. 한국 드라마와 미국 드라마, 일본 드라마를 비교 정리한 것인데, 미국 드라마에 형사가 나오면 수사를 하고, 의사가 나오면 진료를 보고, 기자가 나오면 취재를 하지만, 한국 드라마는 형사가 나오면 연애를 하고, 의사가 나오면 연애를 하고, 기자가 나오면 연애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일본 드라마는? 형사가 나오면 교훈을 이야기하고, 의사가 나오면 교훈을 이야기하며, 기자가 나오면 교훈을 이야기한다.


이제는 철 지난 농담 같았던 저 이야기가 일본 소설 <정욕>의 한자어를 보는 순간 떠올랐다. 正欲. 바른 욕망. 욕망에도 바른 것이 있다니 일본 특유의 한계가 보이는 것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그냥 덮을 수 없었던 것은 저자가 <누구>라는 소설로 알려진 아사이 료라는 점,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가 36회 도쿄 국제 영화제에서 최우수 감독상과 관객상을 수상하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정욕 표지.jpg


소설은 먼저 한 인물의 자기 고백성 글에서 시작한다. 이 도입부가 조금 흥미로운데, 이 글에서 화자는 세상은 내일 죽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돌아가고 있다며 세상을 바라보는 조금 다른 시선을 풀어낸다. 이어서 한 사건의 간략한 브리핑을 보여준 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설은 세 줄기의 각기 다른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준다. 하나는 데라이 히로키라는 검사로 그는 등교 거부를 하며 유튜버로 돈을 벌겠다는 초등학생 아들 다이키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다. 또 하나는 간베 야에코라는 대학생으로 그녀는 대학 페스티벌을 준비하던 중에 처음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무섭지 않은 남자 오로하시 다이야를 만나게 된다. 마지막 기류 나쓰키는 가구점에서 침대를 판매하는 사원이다. 그녀는 고등학교 동창생 사사키 요시미치와 둘만이 이해하는 어떤 기억을 갖고 있다.


소설은 중반까지 이것이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소설 제목에서 이미 ‘욕망’이 주된 테마임을 내비쳤지만, 그 욕망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지 않은 탓이다. 세 인물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와중에 처음으로 한 인물을 통해 감춰진 욕망이 드러나고, 그러면서 각기 다른 세 이야기처럼 보이던 것들이 하나로 이어진다.


사실 ‘바른 욕망’이라는 제목을 지은 순간부터 이 작품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바른 욕망이란 건 없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실제로 소설은 그렇게 흘러간다. 욕망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부터 소수자들의 이야기라는 정체성이 명확해지고, 그들은 연대를 통해 이 사회에서 살아가려 한다. 대다수에 의해 규정된 평범, 보통, 혹은 일반이라는 잣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연대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을 지킨다는 것은 이젠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 전개 방식이다. 이들이 연대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고, 그것이 사회문제로 커지면서 소설은 마무리된다.


영화 정욕 포스터.jpg


최대한 스포일러를 피하려고 애매하게 썼는데, 사실 이런 이야기 구조는 일본의 작품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세상의 대다수에 의해 규정된 사회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소수자. 그들이 연대하여 잘살아 보려 하지만 결국 대다수에게 수용되지 못한 채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는 흐름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이나 내 브런치에서 소개한 적 있는 ‘유랑의 달’에서도 등장한 적 있다. 아마도 일본의 작가들은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본의 경직된 사회 분위기를 이런 이야기 구조를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부모나 뉴스 프로그램의 평론가들이 저토록 관용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미 자기들은 본질적으로 변화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저 공격당하지 않게 받아넘기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단계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문제는 소수자들이 오해받고 수용되지 못하는 과정이 굉장히 작위적이어서 공감을 사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일부러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면서 작가는 주요 인물과 대척점에 있던 한 인물을 활용한다. 이 인물은 소수자들에 대한 오해와 멸시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그의 개입이 그저 우연에 기인했다는 점에서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럽다. 게다가 사건에 빠진 소수자들이 내린 선택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침묵할 것을 고수하는데, 사실 그로써 입게 되는 피해가 더욱 크기 때문이다. 침묵할 것이냐, 입을 열 것이냐. 그 결과를 비교했을 때 침묵을 선택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러한 부자연스러움 때문에 소설은 소수자와 연대, 사회에서의 공존이라는 공감하기 쉬운 전형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단점만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아사이 료라는 작가는 문장력은 부족하지만 통찰력은 뛰어난 작가다. 이야기를 흡입력 있게 만들지 못한다는 점, 몇몇 문장은 번역체에 가까워서 무슨 뜻인지 한 번에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 등이 아쉽지만, 우리의 일상을 꿰뚫는 통찰력 넘치는 장면이 등장할 때가 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에 밑줄을 그은 대목이 많았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뒤집어 보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포인트다.


그러다가 자신이 지금 정말 아들을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 얄팍한 사고에 대한 혐오감을 엔진 삼아 가학적인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또한 이 소설이 무조건 소수자들의 편만 들지 않는다는 점도 흥미롭다. 개인적으로는 등교 거부를 하는 아들 다이키를 향해 사회 일반의 통념을 차분하게 풀어낸 히로키의 사고에 눈길이 갔다. 새로 바뀐 시대에 맞춰 유튜브로 살아가겠다는 아들의 생각과 거기에 안정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적응하여 살아가길 바라는 부모의 생각 모두 설득력을 갖는다는 점이 재미있다. 그리고 소수자의 고충을 토로하는 대목에서 다수에 속하는 평범한 사람들도 자신의 욕망을 마음대로 해소하지 못하고 사는 것은 매한가지라고 반론하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이렇듯 이 소설에는 한 가지 사항을 두고 다양한 시선이 등장한다. 그걸 논의로 확산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이다.


다양한 욕망과 정체성을 존중하는 시대에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는 현대인에게 주어진 숙제다. 이런 변화가 어려운 것은 큰 틀에서의 가치관은 모두가 동의하지만, 세부 내용으로 갈수록 의견 차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트랜스젠더들의 정체성은 지지하지만, 그들과 함께 공중화장실을 써야 한다면 왠지 모르게 불편해지는 것처럼. 당신의 정체성과 욕망은 존중하지만, 그것이 내 삶에 개입된다고 느낄 때 어디까지 조정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문학을 위시한 예술은 그 질문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던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가장 안전하게, 그러면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답을 파고들 수 있는 가상 체험의 장이기 때문이다. <정욕>은 이야기의 완성에는 실패했지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다양한 생각을 사람들과 나누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감동일 줄 알았는데 호러로 끝난 이야기